게임 업계 전체적으로 부침이 있었던 한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도전작과 성과작을 속속 모습을 드러내며 국내 게임 업계의 새로운 이면을 볼 수 있었던 한 해.
그런 2024년 업계 던져진 결정구는 단연 '붉은사막'이 보여준 30분이라 할 수 있겠다.
붉은사막은 파이웰 대륙에서 저마다의 사명을 위해 싸우는 용병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PC와 콘솔 플랫폼으로 개발되는 AAA급 타이틀이다.
지난해 8월 게임스컴을 시작으로 11월 지스타에서 신규 보스 핵세 마리 추가 버전까지 붉은사막 시연 버전을 공개한 펄어비스. 잘했다, 못했다를 떠나 최대 관심사임은 확실했다. 적어도 2024년 업계 사람들 사이에 "붉은사막 해봤나- 어땠나"가 주요 화두였던 것임은 분명했으니까. 그 만큼 그 면면이 너무나 궁금했고, 소감도, 평가도 모두 궁금했다.
그리고 그 30분은 적어도 '펄어비스 게임'이란 브랜드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보통 출시 임박한 게임이 아니라면 게임쇼 현장의 시연 빌드는 짧은 시간 임팩트를 주기 위해 어느 정도는 짜인 각본대로 제작된다. "있어 보이게 만든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속일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그건 바로 현장감, 몰입감이다.
오랜 대기열,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현장,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곳에서 낯선 게임을 한다는 건 호기심에 이어 경계심이 앞선다. 아무리 준비를 했어도 연결성 없이 시작한 시연은 미완의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는 자칫 박한 평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지스타 현장 시연 버전 플레이 = 게임조선 촬영
심지어 왜 이리 어렵던지- 일반적인 게임쇼 시연과는 확실히 달랐다. 차 떼고, 포 떼고 보스를 잡아보라고 4종이나 제공하는 무모한 전략에 "아니, 얘네 미쳤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타협 없는 난이도의 시연 버전은 정말 여러모로 파격적인 행보였다.
하지만 그 과감함이 먹힌 듯하다.
그 짧은 플레이 타임 속에서 어느 순간 그래도 피할 것은 피하고, 막을 것은 막고, 빈틈에 칼을 찔러 넣어 보고, 나름 야심찬 콤보를 만들어 보면서 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아- 한 번만 더 해보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 다들 굴러다니느라 정신없었다는데 이 정도면 난 좀 잘한 것 아닌가- 하는 으쓱함을 느끼게도 해줬다.
화면 밖으로 거칠게 긁혀 나오는 펄어비스 특유의 질감, 무게감, 불바다가 된 전장에서 들끓어 오르는 일렁거림, 세찬 격동을 표현하기 위해 양보 없이 깎고 또 깎아내어 더 고급스러운 텍스처를 선보였으니 보는 맛은 당연한 것이겠고.
타협 없이 난도 높은 시연 빌드를 고집한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이제 펄어비스가 보여줄 것은 그들이 항상 그래왔듯 가장 잘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완성도로 답하는 것이 남았다.
붉은사막 게임 플레이 장면
그리고 또 다른 면, 펄어비스의 대표작 '검은사막'은 2014년 첫 론칭 이후 2024년 서비스 10년을 지나왔다.
어느 순간 명맥이 끊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국내 PC온라인 MMORPG 미씽링크의 산증인이라 하겠으며 글로벌 시장에 발 담그고 아무도 가지 못한 길을 뚜벅뚜벅 개척하는 중이다. 한 해도 빠짐없이 단일 게임 오프라인 행사를 이어오며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4개의 클래스로 OBT를 시작했던 검은사막은 2024년 결산 기준 29개의 클래스를 만나볼 수 있다. 외형과 이펙트 뿐만 아니라 특유의 액션 오리지널리티를 살린 채 말이다.
올비아 마을, 하이델과 칼페온으로 대표되는 지역에서 황금의 땅, 발렌시아와 어둠의 땅, 오딜리타, 끝없는 겨울의 산을 거쳐가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더니 기어코 '아침의 나라', '아침의 나라 : 서울'을 통해 캐릭터와 배경, 건축물, 생활 양식, OST까지 섭렵하며 제대로 각 잡고 동양, 우리 조선의 멋을 담아냈다.
풀 한 포기부터 나부끼는 늑대의 갈기 하나까지, 고집스럽게 오랜 시간 하나의 월드를 끈질기게 창작해온 개발진만이 할 수 있는, 자신들의 세계관에 대한 애정과 이해도에서 비롯된 문화적 상상력, 자신감 섞인 기획력이 돋보이는 스탠스다.
펄어비스, 2025년, 검은사막, 그리고 붉은사막으로 이어지는 라인업.
나열만으로도 짜릿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기다림은 다소 목마를지라도.
[박성일 기자 zephyr@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