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는 주연과 조연, 다양한 등장인물이 있듯이 게임에서도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해 게이머의 몰입감을 높여줍니다. 특히, 대작이라 평가받는 게임은 영화 이상의 스토리와 캐릭터성으로 많은 게이머들에게 여전히 회자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작품 밖에는 기획자, 프로그래머, 일러스트레이터 등 게임이라는 세상을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개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피땀 흘려 만든 게임은 게이머에게 때론 웃음을, 때론 눈물을 선사하며 일상의 피로를 잠시 잊게 만들어 줍니다.때론 주인공, 때론 친구, 때론 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부터 게임이라는 세상을 탄생시킨 개발자들까지 게임에 관련된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했습니다.[편집자 주]
흔히 말하는 '영웅' 유형의 캐릭터는 일반적으로 선을 추구하고 비범한 능력과 남다른 사고를 통해 숱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장르의 다변화와 더불어 다소 뭉뚱그려져 있던 영웅의 정의를 세분화하는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거나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더니 다수의 선이라는 결과 때문에 영웅으로 추앙받는 경우도 생겨나게 됐다.
이번에 소개할 일리단 스톰레이지는 심지어 이 두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유형의 영웅 캐릭터다. 그 행적을 보면 구역질나도록 사악한 인물은 아니어도 결코 선한 인물이라 볼 수 없고,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오명을 쓰면서까지 선한 목적을 달성할 생각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팬들이라면 다들 일리단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이 대책없는 만년동정은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팬덤에서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형제가 친하게 지내는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뭐 흔한 클리셰지만
그의 행동 원리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소꿉친구이자 짝사랑의 대상인 '티란데 위스퍼윈드에 대한 일방적인 구애' 그리고 달의 여사제인 그녀에게 걸맞는 남자가 되기 위한 '힘과 지위에 대한 집착'이다.
실제로 일리단은 본편 시작 이전의 서사를 다루는 '영원의 샘'을 둘러싼 고대의 전쟁에서 티란데에게 잘나게 보이려고 비전 마법을 무분별하게 쓰다가 아군을 오폭하여 지위를 잃었고 마력의 원천인 영원의 샘이 소멸하면 자신의 힘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연합군을 배신하고 살게라스 측에 붙어 강력한 악마의 힘을 얻어낸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타는 군단에게 잡혀온 티란데를 구출하고, 실은 불타는 군단이 넘어오는 차원문을 막기 위해 배신자인 척 불타는 군단에 합류하여 힘을 먹튀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하며 올려치기를 시도하지만, 마지막에 악마의 차원문을 닫은 것은 그의 형인 '말퓨리온 스톰레이지'였고 티란데의 마음은 확실하게 말퓨리온 쪽으로 기울며 일리단은 원하고 바라던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하고 '배신자' 칭호만 얻게 된다.
심지어 전쟁의 발단이 된 영원의 샘을 남들 모르게 또 만들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시비가 붙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탓에 일리단은 체포당한 뒤 감옥에 수감되어버리고 만다. 그 기간은 고대의 전쟁으로부터 '워크래프트 3: 혼돈의 지배'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까지를 통틀어 무려 1만년에 달하며 간수인 마이에브가 누굴 생각했냐고 물으면 "간수님을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만 년 동안 응어리진 증오를 이야기하기에는 해놓은 뻘짓들이 너무 많아서 자업자득으로 취급하는 게 맞다
결국 워크래프트 3 시점에서 불타는 군단의 재침공이 시작되자 악마에 맞서싸울 힘이 필요했던 티란데가 남편을 비롯한 수많은 동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리단을 풀어줬고, 일리단은 그녀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지만 숲을 오염시키던 기물 '굴단의 해골'을 제거하려다가 힘의 성질뿐만 아니라 몸까지 완전히 악마로 변하여 추방당하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일이 모두 꼬이고 꼬이는 와중에도 그의 순애보는 변함이 없었고 악마가 되어 불타는 군단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와중에도 언데드 스컬지에 맞서 싸우다가 실종된 티란데를 구해내는 것은 물론, 언데드 스컬지의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킬제덴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나 티란데를 비롯한 동족을 위협하는 '공공의 적 스컬지를 무너뜨린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리치왕을 없애려는 계획을 진행한다.
중요한 국면에서 아서스 메네실과 1:1 결투를 패배하여 아무래도 좋게 됐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웃랜드로 도망쳐서 골목대장...이 아니라 지배자 노릇을 하다가 사망하며 극 중에서 일시적으로 퇴장했지만, 죽어가는 와중에 남긴 전리품에서 무려 만년을 고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이 담긴 티란데의 기념품'을 드롭하며 수많은 와우저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고, 이는 그를 추종하는 사이버 일리다리들이 '살아단님이 일리계신다'며 활동을 이어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군단' 확장팩에서 부활한 그는 여전히 독선적이고 자기가 가고 싶은대로만 가는 행보를 보여주지만 결과만 따지고 보면 옳은 것이 되어 살게로스를 체포하고 끝내 그가 그토록 원하던 아제로스를 구한 영웅으로 남게 됐다.
1만년 넘게 지속해온 장대한 그의 삽질이 실은 빛의 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며 포장하던 제라를 자기 손으로 날려버리면서 모든 것은 스스로가 선택한 운명이라고 주장하고, 불타는 군단의 본거지인 아르거스와 아제로스를 연결해버린 대형사고조차도 과정보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그의 캐릭터성을 감안하면 오히려 호평이 많다.
누구처럼 억지로 세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니 당연히 캐릭터 붕괴가 발생할 일도 없고 전개 과정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며 칭송받은 것은 덤이다.
부활하자마자 마이웨이로 막 나가는게 참으로 일리단스럽다
복수, 증오를 말하고 다니지만 정작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거나 격하게 증오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일리단은 사악하기 그지 없는 빌런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딱히 선한 캐릭터도 아니며 그저 자신이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고 소망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소시민에 가깝다. 비범하지만 한편으로는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영웅이라는 캐릭터상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일리단의 인기는 이처럼 영웅스럽지 않은 면모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 능력에는 분명 뛰어난 부분이 있지만 워크래프트 세계관에서 보면 독보적인 수준은 아님에도 대단한 척, 할 수 있는 척, 뭔가 가능한 척 온갖 허세를 부리다가 엎어지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며 그 힘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하필이면 죄다 가까이에 있는 주변인물들이라 그 안습함이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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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 제멋대로인 선택의 결과들이 결국에는 아제로스를 구하는데 크게 이바지했고 마지막에는 해방된 티탄 판테온들에게 체포당한 살게라스를 영원히 감시하며 '사실상 함께 유폐되는 간수의 삶'이라는 단 한 번의 순수하게 영웅적인 선택을 자신의 의지로 실행한다.
물론, 원수를 결코 잊지 않는 소인배스러운 일리단의 캐릭터 성격을 생각하면 '불타는 군단의 수장인 살게라스에게 쌓인 게 많아서'라는 추측도 분명 합리적이지만 마지막으로 그의 형과 형수에게 남긴 전언의 내용을 보면 나름대로 아제로스와 우주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결정한 사항임을 유추할 수 있다.
시리즈 내내 '대의를 위해서'라는 자기합리화가 좀 세게 들어가기는 했어도 결국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하고 옳은 길을 선택한 그를 많은 와우저들이 영웅이라 부르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일리단님은 살아계신다, 앞으로도 쭉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