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란 조선시대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 장군에게 파견됐던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뜻합니다. 외교 사절이지만 통신사를 통해 양국의 문화상 교류도 성대하게 이뤄졌습니다.이에 <게임조선>에서는 '게임을 통해 문화를 교류한다'라는 측면에서 게임을 소재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조선통신사'라는 기획 코너를 마련했습니다.최근 뜨거운 화제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까지. <게임조선>이 매주 색다른 문화 콘텐츠를 전달해드리겠습니다.[편집자 주]

실제로 코믹스 기반 미디어 믹스 중 가장 성공했다고 알려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처음으로 히어로들을 소집하는 구심점이 된 인물 '닉 퓨리'의 경우 배우인 사무엘 잭슨이 비밀스럽고 시니컬하지만 믿을 수 있는 흑형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한 덕분에 이후 등장한 대부분의 작품에서 영화와 거의 동일한 비주얼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원작 코믹스에서는 머리카락 수북한 백인이며 비밀스럽게 움직이기보다는 사건 현장에 직접 개입하여 깽판치는 것을 좋아하는 무투파 마초 형님에 가깝다. 실제로 캡콤에서 1993년에 출시한 벨트스크롤 액션게임인 '더 퍼니셔'에서 등장하는 닉 퓨리는 원작에 굉장히 가까운 터프가이 이미지로 묘사되어 주인공인 퍼니셔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실제로 닉 퓨리는 2번 플레이어 위치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기 때문에 오락실에서 굳이 2번 플레이어 위치에 동전을 넣고 게임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이 시절 대부분의 게임은 리소스를 줄이기 위한 게임적 허용으로 도트를 좌우반전하고 있지만
캡콤판 퍼니셔의 닉 퓨리의 경우 코믹스처럼 왼쪽 눈만 애꾸라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방향에 따라 도트 그래픽이 다르게 나온다
방향에 따라 도트 그래픽이 다르게 나온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현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흑형 닉 퓨리에 대해서 블랙워싱이라 비판하는 의견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바뀐 속성이 캐릭터에 몰입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고 배우의 좋은 연기력과 더불어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며 억지로 캐릭터를 띄우려고 주변의 다른 인물들을 겉절이로 만들면서까지 개연성을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블 시네마틱 스튜디오를 인수한 디즈니는 위와 같은 좋은 선례가 있음에도 최근까지도 블랙워싱과 관련하여 연거푸 똥볼을 차며 팬덤의 비판을 듣고 있으며 이는 비단 디즈니만의 문제가 아닌 미디어 믹스 전반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당연히 게임 쪽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인기 캐릭터치고는 출연작이 많지 않은 편
반대로 말하면 짧은 출연만으로 인기를 끌 정도의 호감캐라는 뜻
실제로 '콜 오브 듀티4: 모던 워페어'에 등장하는 '가즈'는 주인공이자 플레이어 캐릭터인 소프, 현장 지휘관 프라이스 대위와 함께 극을 이끌어가는 주축으로 꽤나 인기가 많았던 캐릭터였다. 쉴새 없이 입을 놀리는 떠벌이에 뺀질거리면서도 할 때는 제대로 한다는 유능함과 같이 천재 주인공 유형의 속성을 모두 몰빵으로 받고 있었고 게임 내에서 NPC로 등장하는 다른 SAS 팀원보다 성능이 월등하게 좋았기에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가 다 그렇듯이 게임 중반에 사망하며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기폭제로 작동하고 작전 중 전사했음에도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는 등 특수작전부대의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장치로 쓰였다.
그런데 리부트판인 2019년작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에서는 가즈의 역할을 전혀 다른 캐릭터인 흑인 남성 '카일 게릭'이 꿰차면서 좋지 못한 평가를 듣게 됐다. 리부트판의 서사가 원작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고, 카일 게릭의 캐릭터성도 특수부대원치고는 이례적인 '정의감 넘치는 열혈 캐릭터'로 설정했기에 초반에는 좀 답답한 부분이 있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믿을만한 동료로 성장하는 그 과정 자체를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굳이 엔딩에서 그의 별명이 '가즈(Gaz)'라는 언급을 넣어버린 것이다.
정확히 따지고 들어가면 해당 작품에서 '가즈'는 일종의 특수부대 콜사인처럼 계승되는 닉네임이라는 암시가 있지만 기존의 가즈도, 카일 게릭도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따로 둬도 상관 없을 것을 굳이 가즈라는 인기 캐릭터의 이름에 기대려는 시도를 한 것이 보기 좋게 잘 타는 땔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달리 말하면 누구라도 콜사인 '가즈'가 붙으면
그게 이제부터는 '가즈'라는 뜻

이쪽은 그래도 다른 블랙워싱 사례에 비하면 개연성을 해치는 부분은 거의 없는 편
오히려 원전 북유럽 신화의 예정된 파멸을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대체로 좋은 평을 듣고 있다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의 경우에도 게임성과 완성도 측면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명작이고, 2022년을 엘든 링과 함께 양분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앙그르보다라는 캐릭터 때문에 블랙워싱과 관련된 논란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사실 앙그르보다도 먼저 소개한 가즈처럼 캐릭터 자체는 호평을 받았다. 북유럽 신화 원전에 맞게 꾸준히 아트레우스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호감 스택을 쌓는 것은 물론 신격을 갖추면서 인간성을 서서히 잃고 있는 것을 바로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예견된 미래는 바꿀 수 없지만, 그럼에도 바꿀 수 있는 미세한 부분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캐릭터를 누가 싫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북유럽 신화가 북게르만족에 뿌리를 두고 있고 키가 크고 굵직굵직하며 피부가 창백한 사람들이 대다수인만큼 거의 모든 신들의 용모 묘사에는 게르만족의 특징이 짙게 묻어나오고 있는데 유독 앙그르보다를 바니르 신족만 흑인으로 묘사한 것이 긁어 부스럼을 만든 모양새가 됐다.
물론, 갓 오브 워라는 게임 시리즈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잔혹하게 비트는 것에서 시작했다는 근간을 생각하며 무조건 원전을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굳이 흑인으로 바꿀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 주된 쟁점이다. 뭐 디렉터가 '내가 북유럽 신화 읽어봤는데 백인이라는 이야기 없던데?'라고 비아냥거리며 공격할 여지를 준게 가장 큰 문제지만

맷 소프스 디렉터 말대로 북유럽 신화 등장인물들이 무조건 백인일 필요는 없긴 한데
북유럽 신화를 처음으로 기록했던 사람이 흑인의 존재를 알 가능성은 어느 정도나 될까?

제작진에 일본인이 없지만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
최근 출시된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신작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도 이런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기념비적인 첫 작품인데 반해 더블 주인공 중 하나인 흑인 무사 '야스케'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따지면 야스케는 블랙워싱의 사례로 두어야 하는지 찬반이 갈리는 입지에 놓여있다. '실제로 무사 계급의 가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진위가 불분명하나 게임의 시대적 배경에 해당하는 전국시대 말기에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 있었다는 '흑인 노예 야스케'는 실존하는 인물이며 이는 실존 역사에 허구를 첨가하는 대체역사물이라는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색채에 어느정도 부합하기 때문에 억지로 주인공을 흑인으로 바꿨다고 보기엔 무리수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왜곡 문제를 뗴어놓고 보더라도 주인공과 협력하는 캐릭터들의 세부 설정에서 불필요한 논바이너리, 동성애를 강조하는 내용들이 발견되면서 LGBT를 비롯한 정치적 올바름 코인에 탑승했다는 의혹이 있다.
때문에 처음에 상정한 사무라이측 주인공도 실은 야스케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가 흑인으로 교체되는 사실상의 블랙워싱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게 됐고, 유비소프트의 디렉터 조너선 뒤몽(Jonathan Dumont)이 패미통 인터뷰 중 '흑인 주인공이 외국인의 입장에서 역사에 이입하기 좋다'는 이유로 선정했음을 이야기한 내용이 도매금으로 비판받고 있는 중이다.

사실 사무라이가 다른 나라의 무사 포지션인 것을 생각하면
암살자(Assassin) 역할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피부가 검으니 밤에 안보여서 암살 잘하겠다'라는 나쁜 말은 ㄴㄴ
블랙워싱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좋은 취지, 잠재적인 고객을 늘린다는 상업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콘텐츠를 다시 만드는 창작자 입장에서 분명 구미가 당길만한 소재인 것은 맞다.
다만 원안이 있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대부분의 이용자들은 원작을 즐겼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자신의 추억이 훼손되는 것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확률이 높다. 당연히 원작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자연스레 블랙워싱을 넣는 것은 상당한 리스크를 동반하며 이것이 게이머들에게 납득을 주지 못한다면 대중의 평가가 떨어지는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다.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팀 포트리스 2의 콘셉 아트
사실 블랙워싱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하다 못해 앞서 소개한 닉 퓨리의 사례 외에도 '팀 포트리스 2'의 데모맨 같은 사례면 아무도 블랙워싱이라 비판하지 않는다. 실사판 인어공주처럼 진저(빨간 머리)를 블랙워싱했다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자잘한 설정 변경이 워낙 자주 일어나는 동네다 보니 쿨하게 무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알콜 중독으로 맛이 간 20대 노안 폭탄마'라는 강렬한 캐릭터에게 흑인이라는 속성은 있어도 상관 없고 없어도 상관 없는 취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비록 전문 매체나 평론가들이 게임을 평가할 때 게임성보다 이런 다양성을 우선시하여 점수를 주는 기조가 문제시되기도 했지만, 올해 2월 출시한 '킹덤 컴: 딜리버런스 2'의 경우 전작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다양성 구현보다는 역사적 고증에 집중하여 메타크리틱 88점을 얻어내는 쾌거를 보였기 때문에 분명히 개선될 여지가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다.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