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영혼석을 둘러싼 음모와 암투로 인해 절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성역에 지옥의 그림자가 디시금 드리운다, 불타는 지옥의 악마들이 되돌아오는 게임 '디아블로 4'에 대한 이야기다.
디아블로 4는 약 10년 만에 선보이는 블리자드의 대표 ARPG '디아블로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단순하지만 짜릿한 전투의 손맛 그리고 어둡고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를 거침없이 누비며 악마들을 찌르고 베는 네팔렘의 서사는 핵 앤 슬래시라는 장르의 기틀을 잡으며 지금까지 서비스했거나 아직도 서비스하고 있는 수많은 ARPG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시리즈가 장기화 되면서 '디아블로 시리즈'는 여러 방향으로 변화를 꾀했다. 그것이 때로는 성공, 때로는 실패로 나타났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선과 악이 혼재된 네팔렘과 성역의 존재로 인해 전쟁은 끝나지 않고, 성역을 전초기지로 삼아 천상을 침공하려는 악마들과 대립하는 이 게임은 계속 후속작을 출시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블리자드는 답안을 내놓았다. 과연 그 답안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게임조선에서는 디아블로 4의 비공개 베타 테스트 버전을 직접 플레이해보고 그 내용을 정리해봤다.
■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는 성역 이야기
월드맵의 크기는 상당하지만 15레벨부터 주어지는 탈 것과 함께라면 큰 문제 없다
육성과 시나리오 진행은 전반적으로 2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3편은 확장팩 '영혼을 거두는 자'가 적용되기 전까지 스토리 진행과 육성을 메인 시나리오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진행 도중 만나는 자잘한 전투 이벤트를 제외하면 큰 틀에서 일직선형 전개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디아블로 4는 2편과 같이 퀘스트 저널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2편에서의 퀘스트는 연계성과 맵의 배치 및 레벨 디자인 때문에 대체로 권장 진행 순서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플레이어의 실력이 충분하다면 다음 막으로 넘어가는 핵심 퀘스트를 제외하면 스킵하거나 나중에 클리어하는 등의 변칙 진행이 가능했고 디아블로 4 또한 이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시리즈 최초로 도입되는 오픈 월드를 자유롭게 탐험하는 게 가능했다.
이로 인해 사건 진행 순서가 뒤바뀌며 생기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예를 들어 이미 진행한 다른 퀘스트에서 죽은 인물이 이전 시열대에 해당하는 퀘스트를 나중에 진행할 경우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동료가 돼서 싸우는 등 내러티브 측면에서는 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픈 월드가 처음이라 그런지 서사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종종 보인다
물론, 디아블로 2 당시에도 진행 순서가 정사와 맞지 않는 경우는 꽤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혼돈의 성역에서 디아블로의 봉인을 풀고 해치우기 전에 길목에 해당하는 불길의 강 지역 중심부 '지옥 대장간'에서 메피스토의 영혼석을 부수는 것이 옳은 순서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해당 퀘스트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게임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오히려 확장팩에 들어서는 해당 퀘스트에서 고급 룬과 보석을 주도록 보상이 개편되면서 나중에 진행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기에 마을에서 티리엘과 대면하면 순서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 다그침과 함께 메피스토의 영혼석을 쥐여주는 것이 일종의 밈이 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당시에는 게임 플레이만 재미있으면 된다고 해당 사항을 큰 단점으로 치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킵한 퀘스트 때문에 NPC 기능 활용 시 금액이 비싸지거나 대화 내용에 변동이 생기는 등 긴밀한 연계도 있었기에 베타 버전을 기준으로 디아블로 4의 퀘스트 저널 시스템은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마들과 처절하게 싸워나가는 인간의 모습은 씁쓸하면서도 자연스레 찬사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각 퀘스트 수행 과정은 꽤 재미있었다. 이야기는 모두 흥미진진했고 그저 주변 인물이 시키는 대로만 이동해서 괴물과 악마를 사냥하고 장치를 움직이면 끝이던 3편과 달리 디아블로 4는 퀘스트가 주어지면 몇 가지 단서나 대략적인 방향 외에는 힌트를 주지 않아 플레이어는 능동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두 발로 뛰어야 한다.
특히 '샘의 비밀'이나 '여행자의 기도'와 같은 일부 사이드 퀘스트는 저널의 내용 자체가 수수께끼처럼 나와 있어 비밀을 푸는 과정 자체가 꽤 흥미로웠다. 본편 출시 과정에서 서사 문제만 잘 손보면 괜찮은 시스템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보였다.
■ 가지를 뻗어 나가는 기술의 나무
각 직업별 궁극기와 지속 효과는 오직 1가지씩만 선택할 수 있다.
스킬 빌드는 2편처럼 하위 스킬부터 일정 포인트 이상을 할당하고 일정 레벨에 도달해야만 상위 스킬을 투자할 수 있게 되는 '스킬 트리 시스템'으로 회귀했다.
3편의 룬석 시스템과 같이 액티브 스킬을 찍은 뒤 추가로 포인트를 투자할 수 있는 갈래가 여럿 있어 이를 적용시키면 스킬의 성능이 바뀌긴 하지만 3편만큼 사용 형태가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는 양상을 보이고 선택지 자체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이었다.
코덱스의 효과로 중거리 채널링 기술의 사거리를 비약적으로 늘려 안정감을 실어주는 게 가능하다
다만 업적 방식으로 스킬 강화가 가능한 수집 요소 '코덱스(고문서)'가 꽤나 독특한 느낌을 줬다. 특정 던전을 완벽하게 클리어하면 코덱스가 활성화가 되고 이는 영구적으로 스킬을 강화하게 된다.
특히 일부 코덱스는 혜택을 받는 특정 캐릭터로 클리어하는 것이 다소 쉽지 않은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와 협업 또는 타 캐릭터로 클리어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이는 계정 단위로 공유되는 코덱스의 특성을 생각하면 다양한 캐릭터를 플레이해보면서 던전을 공략해보라는 설계로 보였다.
다만, 이미 활성화된 코덱스를 ON/OFF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쉬웠다. 예를 들어 특정 스킬에 도트 피해 추가와 같은 부가효과를 주는 코덱스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긴 하지만 일정 시간 동안 피해를 반사하거나 입은 피해에 비례한 체력을 회복하는 패턴 등 특정 상황에서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코덱스의 활성화와 비활성화를 시스템적으로 막아놓은 것인지, 아니면 베타 버전이라서 구현이 안 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기에 이는 본편에서 개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려워졌지만 맛있어진 전투
회복 수단이 제한적인 만큼 보스전의 긴장감이 크게 올라갔다
전투는 다른 요소들보다는 3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디아블로 2에서는 메인 보스 전투나 특별한 월드 이벤트가 아닌 이상 봉인이나 각종 장치 작동 및 회수와 같은 상호 작용 요소가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디아블로 4는 일반 필드에서도 크고 작은 전투와 이벤트 중에 빈번하게 상호작용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야만 진행이 가능하거나 편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특히 챔피언 몬스터의 속성 기믹들이 쇼크 랜스(전격 창)으로 이름과 비주얼이 바뀐 비전 파수기 등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전작의 플레이어들은 적응이 쉬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지력 측면에서는 전작보다 분명하게 어려워진 측면 또한 있었다. 게임 내내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포션이 할당된 것은 3편과 같고 사용 가능 횟수도 기본 5회로 늘어났지만, 회복량 자체는 60%에서 35%로 거의 반토막 났고 재사용에 쿨타임이 없는 대신 횟수가 자연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챔피언, 엘리트 몬스터 처치나 다수의 몬스터를 제거하면 등장하던 생명의 구슬이 본작에서는 체력을 직접적으로 채워주는 대신 포션의 스택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변했다. 특히, 전작에서는 메인 보스전 도중 수시로 생명의 구슬이 등장하거나 생명의 구슬이 등장하지 않는 구조라면 반드시 일정 시간마다 재생되는 생명의 샘이 곳곳에 배치되어 유지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디아블로 4는 반드시 보스의 체력 게이지의 일정 비율만큼을 깎아야 생명의 구슬이 등장하기 때문에 화력이 모자라거나 회피 컨트롤에 익숙하지 않다면 좌절을 겪기 쉬운 모양새가 됐다.
'회피'의 성능은 뛰어나지만 지형을 무시하며 통과하지는 못하니 퇴로 확보는 신경 쓰는 것이 좋다
기동성 관련 부분에서는 스페이스바로 작동하는 스킬과 별개인 돌진형 '회피'가 생겨났다. 모든 캐릭터가 사용할 수 있고 공포, 기절 등 군중 제어기(CC기)에 걸린 상태를 제외하면 피격 중에도 자유롭게 발동할 수 있으며, 발동 도중에는 일시적으로 CC를 무시하는 저지 불가 특성이 적용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회피'는 탐험과 전투 양면에서 꽤 높은 활용도를 보이고 있었다. 3편에서 낮은 기동성으로 인해 유틸기 '군마 질주'를 거의 대부분의 빌드에서 채용하던 '성전사'처럼 자유도가 떨어지는 경우를 고려한 게 아닐까 싶은 정도다.
물론 게임이 마냥 어려워져서 불합리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의 레벨이 올라가고 각종 지속 효과와 코덱스, 아이템 옵션을 활용하면 전투의 난도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포션 같은 경우에는 등급을 업그레이드하여 회복량과 사용 가능 횟수 자체를 늘릴 수 있었고 회피 또한 마찬가지로 사용횟수가 늘어나는 조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변화는 전작의 전투가 지나치게 쉬운 패턴, 각종 속성 완전 내성 장비로 전투의 긴장감이 상당히 떨어졌다는 부분을 의식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모든 플레이어에게 지지받을 만한 결과물은 아닐지라도 재미 측면에서는 적당한 타협점을 찾은 셈이다.
■ 직관성을 유지하며 활용도 높아진 아이템 체계
특정 직업이 다중 무기를 사용하는 것만 제외하면 능력치는 굉장히 단순하게 나와 있어 직관성이 높다.
아이템은 신규 원소 속성인 '그림자'가 도입된 것 외에는 피해량 증가, 쿨타임 감소 등 각종 능력치 배분과 보너스 효과를 대부분 직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3편의 체계를 따르고 있어 굉장히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돋보이는 것은 1편과 2편에 등장했던 스킬 레벨링 또는 발동 옵션의 복귀로, 굳이 스킬 트리 내에서 포인트를 들여 습득하지 않아도 아이템의 효과로 해당 스킬을 공짜로 사용하거나 레벨을 올려 이득을 볼 수 있었다.
2편의 룬워드 '수수께끼'에 달려 있던 순간이동처럼 제공 스킬이 완전히 직업의 제한을 무시하는 경우는 베타 버전을 기준으로는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특정 직업군의 스킬은 'X 전용(X only)'과 같은 방식으로 하여금 옵션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포인트를 들여 습득하지 않았지만 아이템으로 사용이 가능해진 스킬은 레벨 숫자가 파란색으로 표기된다
전투 중 스킬 슬롯 교체가 가능한 본작의 특성을 생각하면 버프나 유틸기 등 지속형 액티브의 포인트 투자는 최소화하면서 지속 효과에 잔뜩 포인트를 몰아주는 등 연구 여하에 따라 생각 이상의 높은 활용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직업별로 아이템 슬롯을 활용하는 방향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야만용사는 양손 둔기, 양손 도검, 한손 쌍수를 모두 착용하여 전투에 임하고 도적 또한 한손 쌍수와 원거리 무기를 동시에 다룰 수 있게 됐다.
기술 사용에 근접 무기 혹은 원거리 무기 착용을 강제하는 각 직업 기술들의 특성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이를 교체가 아닌 병행의 형태로 사용하기 때문에 전작들에서 착용 장비에 따라 특정 계통의 스킬만 강제하는 빌드가 아닌 다양한 빌드를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야만용사의 경우 '걸어 다니는 무기고'가 해당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것을 상정한 지속 효과인데 양손 둔기-양손 검-한손 쌍수 스킬을 같은 타입이 반복되지 않게 교차 사용할 경우 공격력에 보너스를 얻게 된다.
■ 총평
잔뜩 벌크업한 드루이드만 빼면 아주 익숙한 캠프파이어 풍경이다
참신함이라는 아집에 사로잡혀 이도 저도 아니었던 전작들에 크게 대였던 탓에 기대치가 한껏 낮아져서 그랬던 것일까? 필자가 이번에 직접 플레이해본 디아블로 4는 생각 이상으로 안정적인 느낌을 줬고 충분한 기대감 또한 들게 만들었다.
등장하는 캐릭터도, 기술도, 아이템도 모두 익숙했지만 대부분의 블리자드 게임들이 늘 그렇듯 진부하면서 충분히 먹을 만한 맛이 났다는 것이 핵심이다. 오히려 오픈 월드라는 요소를 새로 도입하면서 잘 버무려서 이 정도의 색채를 냈던 것이 용할 정도다.
리뷰 내용 중 지속적으로 전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디아블로 4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회귀' 그리고 '조화'였다. 가장 색채가 비슷한 것은 최근 리마스터 타이틀을 발매된 시리즈 최고의 흥행작 '디아블로 2'였고 디아블로 4에 대한 소감을 한 마디로 표현해본다면 '현대적인 감각과 시스템이 가미된 디아블로 2를 플레이하는 느낌'이라 부를 수 있겠다.
3편에서는 무지개빛 휘향찬란하던 워소 마법들이 다소 어둡고 칙칙해진 느낌으로 회귀했다
특히, 아트워크 스타일이 2편처럼 검고 붉은, 어둡고 칙칙한 색조를 보이는 변화가 가장 눈에 띄었다. 세계석이 파괴된 것도 모자라 영혼 수확이라는 재앙이 휩쓸고 간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게임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고 그에 따른 변화라고 본다면 적절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식 출시했을 때 상기한 단점을 수정하고 모든 내용이 만족스러운 퀄리티로 나올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큰 틀에서 디아블로 4의 방향성은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이 정도의 폼을 본편 내내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디아블로 4가 핵 앤 슬래시 ARPG의 원조 맛집이라는 타이틀을 되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신호현 기자 gamedesk@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