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압 계측 장치 '오실로스코프'를 사용한 최초의 비디오 게임 '테니스 포 투(1958)'를 시작으로 점을 찍어 세계를 표현하던(Pixel) 비디오 게임의 그래픽은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고 확장됐다.
8비트에서 16비트로, 16비트에서 32비트로 처리할 수 있는 용량과 표현할 수 있는 색깔의 가지수가 많아지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질적 향상을 이뤄냈고 이를 찍어내는 과정도 하나하나 점을 찍고 출력한 그래픽이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한 안티엘리어싱 작업을 거칠 필요 없이 모델링 하나 만들어두면 스프라이트 데이터가 뚝딱 만들어지는 등 훨씬 세련된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게이머들은 수많은 게임사들이 열심히 치고 받으며 절차탁마하고, 하루가 멀다하며 명작이 쏟아내던, 본격적인 게임 그래픽의 트렌드가 3D로 넘어가기 직전 8비트-16비트 시절 게임에 대한 막연한 향수를 느낀다. 그리고 그런 게이머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작품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나오는 중이다.
과연 비교적 최근까지 출시되고 있는,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는 픽셀-도트풍 레트로 게임들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왜 그런 게임에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 셔블 나이트 (2014)
중소 개발사 요트 클럽 게임즈에서 만든 '셔블 나이트'는 모든 요소가 대놓고 8090 게임을 떠올리게 만든다. 매우 직관적이지만 세심하게 움직이기는 어려운 까다로운 조작, 처음에는 빠져나갈 구석이 전혀 없어보이지만 익숙해지면 의외로 허무하게 파훼할 수 있는 패턴이 딱 그 시절 그 감성을 자극한다.
칩튠 느낌의 배경음악 또한 샨테, 덕테일즈, 록맨 등 이름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명작 플랫포머 게임의 제작에 참여헀던 작곡가들이 제공하고 있어 플레이하는 내내 게임에 몰입하기 쉽게 만들어주며 게임 세이브 파일 작성 중 작명으로 치트 코드를 적용시킬 수 있는 낡아빠진 느낌마저 레트로 게임을 즐겨본 사람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본편의 구성과 레벨 디자인 자체는 단촐하지만 회차별 플레이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거나 라이벌 캐릭터를 플레이어블로 다시 깨고 스스로에게 제약을 거는 챌린지 모드 등 전혀 다른 구성을 맛 볼 수 있어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으며 나중에 추가된 DLC 2편의 볼륨과 완성도도 본편에 전혀 뒤쳐지지 않아 이 역시 게임팩과 게임팩을 합쳐 하나로 만들던 메가드라이브의 도킹 팩을 연상케 한다.
덕분에 이런 게임하면 사족을 못쓰는 콘솔 팬층에게 제대로 매력을 어필한 것인지 PC판 발매 이후 3년 뒤 닌텐도 스위치로 이식되는 파격적인 사후지원이 들어갔고 50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닌텐도 스위치로 출시된 플랫포머 장르 중 가장 많이 팔린 게임으로 등극했다.
■ 언더테일 (2015)
스토리가 중심이 되는 게임인데도 이를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하는 스트리머들의 방송 문화, '와, 샌즈!' '언더테일 아시는구나'로 대표되는 미성숙한 팬덤 때문에 이미지가 많이 깎여나가긴 했지만 작품성만 두고 본다면 '언더테일'은 근 10년간 출시된 도트 게임 중에서 가장 좋은 평가와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실시간으로 적의 공격을 피하긴 하지만 일단은 순서대로 한번 씩 합을 주고 받는 턴제 공방, 어떤 커맨드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당장의 전투 결과 뿐만 아니라 이야기 전체에 영향을 주는 서사구조, 지나가는 기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모두 세심한 설정을 덧붙인 치밀한 구성 등 장점은 차고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팔레트 스왑이나 약간의 변조 등 그래픽 리소스를 재활용하는 것도 거의 없어 대부분의 고유한 도트 모델링을 가지고 있으며 음악 또한 기반이 되는 창작곡을 늘이거나 압축하고 자르고 붙이는 간단한 루틴을 통해 어레인지하여 굉장히 흥미로운 구성을 갖추고 있다.
분명 개발자 '토비 폭스'는 1인 개발이라는 힘든 길을 선택했고 시대상과는 다소 동떨어진, 낡은 방식으로 플레이하는 옛날 게임을 만들었다. 하지만 약간 어려울지는 몰라도 단순 클리어 자체는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는 '절묘한 난이도', 다회차 플레이가 권장되는 '멀티엔딩', 일부러 부연 설명을 생략하고 치밀하게 배치한 '맥거핀'은 팬덤이 알아서 파고든 뒤 2차 창작을 하며 가지고 놀 수 있는 결과물읗 낳았다.
덕분에 언더테일은 당해 GOTY(올해의 게임) 8개를 수상하며 거대 개발사의 AAA급 작품인 슈퍼 마리오 메이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염을 토헀으며 게임의 핵심 스토리를 모른다는 전제 하에서는 여전히 높은 게임성과 훌륭한 가성비를 자랑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엔터 더 건전 (2016)
사방팔방에서 탄막이 쏟아지고 짧은 무적을 부여해주는 '구르기'하나에 의존하여 모든 적을 쏴서 제거한다. 테드 코퍼레이션에서 개발한 1990년작 아케이드 게임 '블러드 브로스'가 아니라 2016년 닷지 롤이 내놓은 '엔터 더 건전'의 이야기다.
앞서 소개한 케케묵은 플레이스타일은 물론이거니와 배경 텍스쳐 빼고는 쌍팔년도 느낌 충만한 그래픽, 이걸 사람이 깨라고 만든건가 싶은 난이도, 봄(전멸폭탄)의 역할을 대신하는 등 공포탄의 존재 등 모든 것이 코인 하나 넣으면 4스테이지를 채 넘기기 힘들었던 구식 아케이드 슈팅 게임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터 더 건전은 놀랍게도 2020년 기준 전 기종에서 3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인디게임 시장의 대표 인기작 중 하나다. 불편한 요소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이를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클리어했을 때의 성취감이 대단하며 서브컬처에 빠삭한 진짜배기 게이머들이 좋아하는 '아는만큼 보이는 것'이 즐비하다.
더군다나 출시 초기에는 고난이도 게임인 '로그라이크' 장르 팬덤을 겨냥한 몹시 하드한 구성을 취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대형 콘텐츠 업데이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진입장벽을 낮추는 독특한 접근 방식으로 대중성까지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최근 발매한 외전격 속편인 '엑시트 더 건전'은 단방향 횡스크롤로 진행 방식이 약간 달라졌지만 여전히 준수한 퀄리티로 호평받고 있는 상황인데 이대로라면 '건전'이라는 이름으로 프랜차이즈 시리즈화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 바바 이즈 유 (2019)
도트 그래픽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작품들은 대체로 벨트스크롤, 플랫포머, 런앤건, 대전격투 등 '액션'을 메인 디쉬로 내세운 장르 게임들이었다.
대부분 당대 기기의 하드웨어 성능을 극한까지 이끌어낸 부드럽과 화려한 그래픽과 양질의 사운드로 게이머들을 사로잡았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 작품은 리소스 투자를 최소화하면서 게임성을 극한까지 올리며 살아남았다.
바바 이즈 유는 퍼즐이라는 장르에서 알 수 있듯이 후자에 해당하는 케이스다. 창고지기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레트로 게임 '소코반'처럼 플레이어는 주어진 스테이지에서 오브젝트(객체)를 움직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그래픽은 잘 쳐줘봐야 8비트 수준에서 조금 세련된 색감을 쓰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소기의 목적 달성이라는 것이 원전으로 보이는 소코반처럼 단순하게 A라는 물건을 B라는 위치로 옮겨놓으라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응용력이 높은 사람은 스스로 룰을 파괴하고 재창조하는 창발적 플레이로 새로운 재미를 개척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퍼즐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다. 제작자가 의도한 방법이든 자신이 새로 만든 방법이든 각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을 때 누구든 무릎을 탁 치고 납득할 수 있으며 '바바'가 아닌 '바보'였던 스스로를 되돌아불 뿐 게임의 레벨 디자인에 태클을 걸기 힘들다.
록맨 8(1996, 左)과 록맨 9(2008, 右) 록맨 9이 추억팔이로 훨씬 높은 판매량을 보였지만 부족한 게임성 때문에 평가는 떨어지는 편
2000년대 후반에 시작된 레트로 붐은 오로지 추억팔이에만 매달리는 단세포적 발상에 멈춰 있었고 실제로 오래가지 못하는 듯했다.
게다가 지금 와서 픽셀과 도트 기반 게임을 만드는 것이 제작자 입장에서 수지타산을 곱씹어 생각해보면 결코 남는 장사는 아니다. 옛 추억에 잠겨 그 시절 느낌을 주는 게임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는 해도 그게 결코 게이머들 중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레트로 게임, 정확히는 유사 레트로 게임은 폭발적이진 않아도 꾸준히 소비되고 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위의 사례처럼 보면 그래픽이나 사운드와 같은 구성 요소에서 옛 느낌이 물씬 풍길 뿐 근본적으로는 게임 자체의 높은 완성도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발전할테고 앞으로 더 선명하고 멋진 그래픽, 더 근사하고 듣기 좋은 사운드의 게임이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40년 가까이 사랑받은 픽셀-도트풍 게임의 미래가 어두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임 그 자체를 사랑하고 근본적인 즐거움을 좇는 개발자와 게이머가 있는 한 말이다.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