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맨 시리즈는 후속작 없이 단절된 기간이 길다 보니 정신적 후속작을 표방하는 친구들이 참 많이도 나왔다. 이미 록맨 시리즈를 제작헀던 사람들이 캡콤을 떠나 만들었던 아주어 스트라이커 건볼트, 루미너스 어벤저 익스, 마이티 넘버 나인이라는 선례가 존재하고 이번 기사에서 소개할 '원 스텝 프롬 에덴'도 이러한 정신작 후속작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게임은 뭔가 심상치 않다. 앞서 소개한 선례들은 그래도 원작에 해당하는 작품들과 대동소이한 느낌을 주고 있는 반면 원 스텝 프롬 에덴은 개발자 '토마스 강'이 팬메이드로 제작하고 있었던 인디게임이었던 만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넣을 건 넣고 뺄 건 빼는 마개조가 이뤄졌고 그 결과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게임으로 완성됐다.
■ 이 또한 정신적 후속작
타일위를 움직이면서 피하고 때린다, 굉장히 익숙한 광경 = 게임조선 촬영
원 스텝 프롬 에덴에 영향을 준 캡콤의 록맨 에그제(EXE) 시리즈는 일반적인 록맨 시리즈에서 기대할 수 있는 플랫포머-런앤건의 범주에서는 상당히 벗어나 있는 작품이었고 그 이질감 때문에 처음에는 록맨 시리즈의 팬들로부터 레이싱, 퍼즐, 축구와 같은 장르 확장을 위한 실험작으로 취급받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패턴 암기와 회피 위주로 강력한 보스를 상대하는 록맨 시리즈의 기본 메커니즘은 유지하면서 무작위로 등장하는 배틀칩과 한정적인 규칙과 자원에 따라 전략적인 전투를 한다는 독특한 콘셉트가 일부 게이머를 사로잡았고 후속작을 전개하며 이를 가다듬어 게임을 발전시킨 결과 클래식, X, Z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의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시전 중 방향 전환이 가능한 주문이지만 적의 공격을 회피한다고 과하게 움직이느라 모조리 빗나갔다 = 게임조선 촬영
원 스텝 프롬 에덴의 전투는 이러한 록맨 에그제의 장점을 온전히 승계하고 있다. 타일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오가며 무작위로 등장하는 주문을 적재적소에 사용해야 하며 주문의 소모값, 위력, 공격방식과 범위가 모두 제각각이라서 조금만 실수하면 한 끝 차이로 공격이 빗나가는 게 일상다반사다.
특히 이 게임은 잡몹들조차 상당히 위협적인 패턴으로 무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체력 회복 수단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숙달된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 십중팔구 보스전에 진입한 순간 이미 체력적인 손실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한다. 따라서 손으로는 적의 공격을 계속 회피하면서 어떻게 해야 더욱 공격을 효율적으로 잘 맞힐 수 있지 뇌를 끊임없이 굴려야 한다는 의미다.
■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주사위 신
3분의 1밖에 진행하지 않았는데 이런 집중포화가 떨어지고 있다 = 게임조선 촬영
무작위성은 한층 더 악랄해졌다. 장르에 로그라이크가 명시된 만큼 등장하는 적의 타입이나 구성, 각종 기믹이 매번 플레이할때마다 달라지는데 이게 록맨 에그제를 베이스로 한 특유의 전투 시스템과 합쳐져 난이도의 헬적화를 이루고 있다.
물론 매 챕터를 클리어 할 때마다 다음으로 이동할 챕터를 플레이어가 고를 수 있고 챕터 내에서도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하는 경로를 직접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 나올지 예측하고 패턴화할 수는 있지만 확실한 것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까지 알 수 없다.
대강 어떤 기믹이 등장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만 어떤 적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 게임조선 촬영
전투 중의 주문 선택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는 덱 내에 보유하고 있는 주문만이 돌아가면서 등장하고 포커스로 특정 계통 주문의 등장 확률을 보정할 수 있으며 인터페이스를 통해 어떤 주문이 다음 차례에 어떤 순서대로 나올지 정도는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때에도 확실한 선택권은 주지 않는다.
록맨 에그제의 경우 일정 시간마다 배틀칩 인터페이스를 불러오면서 게임을 잠시 멈추고 어떤 배틀칩을 어떤 순서대로 사용할지 고를 수 있었다. 정신없는 전투 중에도 잠시 숨을 돌리고 적에게 반격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던 작전타임이 원 스텝 프롬 에덴에는 없기 때문에 초심자 내지는 록맨 에그제 경험자들은 게임에 적응하기 전까지 이 부분에서 난해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 오직 전투에만 집중한 게임성
진짜로 싱글 플레이 모드에 들어가면 다짜고짜 캐릭터 선택창 나오고 끝이다 = 게임조선 촬영
전투 시스템을 엄청나게 손본 대신 다른 요소의 비중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일단 스토리가 굉장히 간소한 편인데 게임을 시작하면 프롤로그와 같이 배경 설정에 대한 내용은 인게임에서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으며 보여 주는 것은 캐릭터의 능력과 특화된 주문 분야 정도뿐이다.
물론 게임을 반복 플레이하면서 모든 주요 캐릭터들이 에덴을 향한다는 공통의 목적을 알 수 있고 매 챕터의 마지막에 격돌하는 보스전은 그런 캐릭터들의 일시적인 갈등이라는 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보스전 이후 상대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에 따라 약간의 변화 정도만 있을 뿐 일직선 전개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주는 수준은 아니다.
플레이어가 보스전을 마치고 살려둔 캐릭터는 때때로 등장하여 도움을 준다 = 게임조선 촬영
록맨 에그제가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능할 법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흡입력 있는 스토리 전개와 흥미로운 퍼즐과 어드벤처 등의 부가 요소를 승계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하지만 이 게임은 아직 얼리 억세스 버전이라 개선의 여지가 충분하며 오히려 언어의 장벽 때문에 해당 요소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면 온전히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원 스텝 프롬 에덴이 낫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 오리지널 요소에 대하여
인질 구출 임무는 빠르게 적 대상을 제거하는 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지만 화력이 부족한 초반에는 몸으로 때워야 한다 = 게임조선 촬영
전반적으로 록맨 에그제와 비교하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왔지만 그래도 원 스텝 프롬 에덴은 독자적인 오리지널 요소도 나름 제대로 갖추고 있다.
일단 중립 NPC를 일정 시간 동안 적의 공세로부터 지켜내거나 일정 시간 내에 적을 처리하여 구출하는 '인질 구출'이나 어지간한 보스전보다 더욱 까다로운 제약을 걸어 플레이어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하는 '재해 스테이지' 등은 록맨 에그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부분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 재해 기믹이 발동하자 타일 전체에 피하기 힘든 집중 포화가 시작됐다 = 게임조선 촬영
그 중에서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인 '아티팩트'가 제법 흥미로웠다. 록맨 에그제의 내비 커스터마이징은 룰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몇 번이고 자기 입맛에 맞게 개조가 가능하며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이득만을 가져다줬지만 이쪽은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 대신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 아티팩트은 1회용으로만 사용 가능한 등 이런저런 제약이 걸려 있기에 굉장히 신중하게 선택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받지 않고 거를 필요가 있었다.
대신 착용 가능한 개수에 제한이 없으며 초중반에 이벤트만 잘 만나면 무시무시한 아티팩트로 떡칠을 한 OP캐릭터를 손쉽게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등장하는 아티팩트의 등급이나 종류도 결국엔 무작위성을 띄고 있다 보니 늘 주사위 신에게 기도하는 처지였지만 말이다.
운이 좋으면 위와 같이 초반에 2줄이 넘는 아티펙트를 보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 게임조선 촬영
원 스텝 프롬 에덴 플레이 영상
록맨 에그제는 세계관이 연동되는 유성의 록맨까지 포함하여 시리즈가 깔끔한 완결을 맞이하여 후속작이 나올 여지가 없었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는데 '원 스텝 프롬 에덴'은 그러한 팬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랠만한 멋진 신작이었다.
록맨 에그제와 많이 닮았고 비교가 되는 건 애초에 제작자부터가 게임을 제작하고 있던 2017년까지 록맨 에그제 관련 커뮤니티였던 '팀 배틀네트워크'에서 활동했던 골수팬인지라 딩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비록 록맨 에그제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줄지언정 엄연히 다른 게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제작자는 본업이 아닌 취미생활에 팬심 하나만으로 개발에 착수하여 게임의 디자인과 사운드, 픽셀 아티스트까지 혼자 도맡아 진행했다.
크라우드 펀딩과 관련 종사자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400만 달러라는 돈을 시궁창에 버리고 게임 출시일도 차일피일 미뤘던 모 작품에 비하면 오히려 당초 모금액은 1만달러 내외로 설정하고 출시일도 제대로 지켜 이 정도의 퀄리티로 완성하여 출시했다. 당연히 원 스텝 프롬 에덴과 그 제작자 토마스 강은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