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플랫폼으로 급부상 중인 VR(가상현실)이 국내 상륙을 목전에 두고 있다.
최근 대만기업 HTC는 빠르면 8월 한국에 'HTC 바이브'를 정식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VR'도 지난 28일 발표를 통해 10월 13일 발매가 확정된 상태다. 그동안 게이머들에게 체험기로만 존재하던 환상의 기기를 곧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부 발빠른 게임사들은 이 뜨거운 시장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미 VR전용 게임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기도 하다.
블루홀(대표 김강석)도 이 패권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도전자 중 하나다. 블루홀은 2014년 말 온라인 MMORPG(다중접속역할분담게임) 외길 개발사 행보를 벗어나 다양한 플랫폼과 장르에 도전을 선언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거기에 VR이 빠질리 없었다.
제일 먼저 'VR팀'이 신설됐다. 회의에서 "팀 명은 뭐로 할까요?"라는 의제에 1분도 안 돼서 결정됐을 것 같은, 그래서 게임 회사다운 톡톡 튀는 작명센스가 '1'도 느껴지지 않는 팀이 그렇게 생겨났다.
게임조선에서 테라를 뛰어넘는 글로벌 히트작에 도전하는 VR팀의 팀장, '김지호 PD'에게 그의 행보와 VR팀의 탄생, 그리고 현재 개발하고 있는 게임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봤다.
▲ 김지호PD는 말수가 적어 인터뷰가 힘든 편이었다. 그래도 미소는 최고급!
◆ 김지호 PD. 얼리아답터를 만드는 얼리아답터
김지호 PD는 평소에도 뉴미디어에 관심이 많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카이스트 전산과를 졸업한 90년대 중반, 이제 한국에 갓 보급된 'PC 통신'으로 'TextMUD(텍스트머드)' 게임 '단군의땅'을 개발했다. 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상용화된 텍스트 머드게임이기도 하다.
그 뒤인 99년에 웹게임 '아크메이지'를 개발했다. 그때는 아직 '웹게임'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다. 아크메이지는 꽤 오랜 기간 국내 동시접속자 1위를 기록한 게임이기도 하다. 2006년에는 모 통신회사에서 가상현실 프로젝트에 참여, 다년간 서울시 전체를 가상세계로 만드는 작업도 진행한 바 있다.
우리는 신문물을 남들보다 빨리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을 '얼리아답터'라 칭한다. 김 PD는 그런 얼리아답터를 만들어내는 얼리아답터다.
그런 그가 VR 산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 단군의땅. 당시 다른 머드 게임들보다 한차원 높은 게임이었다.
◆ 블루홀과 함께 가장 뜨거운 불모지에 뛰어들다.
김지호 PD가 가장 먼저 한 일은 VR 개발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찾는 것. 비슷한 시기에 사업 확장을 시작해 VR 인재를 찾고 있는 블루홀은 그가 찾는 가장 알맞은 보금자리였다. 김 PD와 블루홀은 망치와 못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입사는 단숨에 이뤄져 VR 팀장이라는 중책이 주어졌다.
개발을 시작하기 전 개발 플랫폼과 장르를 정해야 했다. 김 PD는 성격답게 적게나마 보급된 모바일보다 더 새로운 콘솔과 PC쪽 VR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결과는 'HTC바이브', '오큘러스리프트'를 활용한 RPG 게임으로 정했다.
기왕 만드는 거 현존 VR기기로 할 수 있는 최상의 체험을 목표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블루홀도 이 결정을 존중해줘서 방향은 비교적 빠르게 결정됐다.
▲ 기왕이면 더 새로운 것으로...
기존 게임들은 많은 개발을 거치면서 쌓인 프로세스와 노하우가 있는 데 비해 VR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시장은 유례없이 뜨거운데 개발 환경은 아직 갖춰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뜨거운 불모지인 셈이다.
처음은 기존의 개발 프로세스대로 만들어봤다. 그런데 기존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버그가 튀어나왔다. 여기서는 '기존 상식으로 만들면 안 되는구나'라는 교훈을 얻었다. 이는 많은 경험을 통해서만 친해질 수 있는, 그래서 개발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노하우'라는 친구가 창작의 발목을 잡는 '고정관념'으로 돌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지호 PD의 첫 결론은 '백지부터 시작하자'였다. 그렇게 VR팀은 아무런 매뉴얼도, 기반도, 노하우도 없는 플랫폼에 뛰어들어 '맨몸'과 '시행착오'라는 무기만 들고 헤쳐나갔다. 그렇게 기초부터 시작한 작업은 그럴싸한 캐릭터 하나 만들지 못하고 6개월이 걸렸다.
김 PD는 바닥부터 새로운 문법을 쌓아나간다는 생각으로 그냥 만들고 또 만들었다.
김지호 PD가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소속사인 블루홀의 믿음도 컸다. 블루홀은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과물 하나 없이 '노하우'만 쌓고 있는 VR팀을 묵묵히 믿고 기다렸다. VR이 '뉴미디어, 차세대 먹거리'라는 점을 감안해도 긴 기간 동안 믿고 기다리는 회사는 생각보다 드물다.
지금까지 고생한 것은 겨우 스타트 라인에 서기 위한 준비였을 뿐이지만, 블루홀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자격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 김 PD는 기다려준 블루홀에 고마워했다.
◆ 알 수 없는 미래를 즐기는 마음으로...
아직 갈 길은 까마득하다. 연출기법, 사운드, 하드웨어 인터페이스,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등 개발 중에 어떤 녀석이 걸림돌이 될지, 또 그 크기는 어떨지, 심지어 그 돌을 치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원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감히 예측할 수도 없다.
김지호 PD는 그것을 'VR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VR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나왔던 모든 플랫폼이 따라올 수 없는 몰입감을 가졌다.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말이다. 그런 대~단한 녀석을 다루는데 그 정도 문제와 노력 없이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김 PD는 지금도 팀원들과 블루홀 사옥 한 켠에서 VR과 씨름 중이다. 그는 게임이 완성될 때쯤 어떤 VR기기가 나올지, 어떤 주변기기가 대세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세계에서도 먹히는 VR RPG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다.
그는 지금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배향훈 기자 tesse@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