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기자가 학창시절이었던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심각한 비주류 문화, 즉 서브컬처였다. 당시 게임을 즐기기 위한 수단(PC, 콘솔)은 지금과 달리 상상을 초월하게 비싼 물건이었고, 그나마 저렴하게 즐길 수 있었던 '오락실'은 '불량배와 담배 연기의 집합체'정도로 인식되곤 했다.
그랬던 게임이 PC방, 온라인 게임, 모바일 등장의 시대를 거치면서 그야말로 천지개벽.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마저도 유명한 게임의 제목 한두 개 정도는 알고 있는 그런 시대가 됐다.
한국에서 게임은 이제 더이상 비주류가 아닌 주류문화가 됐다는 의미다.
▲ 게임은 이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류 문화가 됐다.
새삼스레 강조하고 싶은 게 기자는 현(現) 직업에서 알 수 있듯 학창시절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광적으로, 집요하게 좋아했다. 게임에 투자하는 돈과 시간이 또래보다 월등히 많았고 그에 따른 지식은 웬만한 마니아들도 인정할 정도다.
그래서 기자는 꽤 일찍부터 '난 니들이 모르는 게임도 훨씬 많이 알고 그 재미도 알지롱~'같은 속칭 '서브컬처부심'이 있었다. 지금은 나이만큼 겸손함도 쌓여 대놓고 말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가슴 한 켠에 살짝 숨겨서 품고 다니는 사람이기도 하다. 기자의 글을 관심 있게 본 게이머가 있다면 본인이 쓴 기사에는 은근히 '서브컬처'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는 중2병에 가까운 자부심이었지만 지금은 나이를 먹고 조금 현명해져서 그런지 그럴싸한 이유가 더해졌다. '주류에 밀리는 상대적 약자를 응원한다'는 인도적 차원과 '문화의 규모가 건강하게 크려면 서브컬처 발전은 꼭 필요한 요소'라는 대의적 명분이 기자의 중2병을 감춰주는 방패가 됐다.
▲ 기자는 마이너부심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수준이다. 크큭!! 갑자기 왼손에 흑염룡이...
◆ 엑스에이전시의 아버지 이상균 디렉터를 만나다.
괜스레 서론이 길어진 이유는 오늘 소개하는 블루홀(대표 김강석)의 '엑스에이전시'와 연관이 깊어서다. 엑스에이전시는 모바일 시장에 RPG(역할분담게임), 액션, 퍼즐 장르가 주류가 된 세상에서 소리소문없이 론칭한 '괴작'이다. 장르도, 게임 내용도, 스토리도, 심지어 게임을 총괄한 프로듀서도 주류와는 꽤 거리가 멀다.
기자가 인터뷰를 통해 듣고 또, 플레이를 통해 경험했던 엑스에이전시라는 게임은 아래와 같다.
'비주얼 노블'에 왕복 따귀를 날릴 만큼 미려한 일러스트와 스토리를 가졌지만 정작 그들이 부르는 장르는 '신감각 숨바꼭질'인 게임. 튜토리얼만 갓 끝낸 뉴비가 최고 레벨에 과금까지 한 게이머를 한 대도 안 맞고 이길 수도 있는 게임. 과금을 해도 센스 있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센스가 있어도 운이 좋은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게임.
기자가 평생을 가치 있다고 외치던 '서브컬처'에 이보다 잘 맞는 게임이 있을까? 게임을 알았을 때부터 꼭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인터뷰는 다른 기자가 진행하기로 했지만 뺏어오다시피 가져왔다. 물론 "OO 기자님 요즘 바쁘시던데 제가 이번 인터뷰는 대신 갈게요"라는 사회성 넘치는 멘트도 잊지 않았다.
이상균 디렉터는 이전에 이상균 작가라 불리던 사람이다.
연배가 좀 있고 소싯적 판타지 소설 좀 읽었던 게이머라면 이상균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으리라. '아 혹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뻐하자. 그는 그 유명한 판타지 소설 '하얀 로나프의 강'의 저자 이상균 전(前) 작가가 맞다.
이 디렉터는 "난 전업 작가였던 적은 없고, 학생 시절 취미로 장르 소설을 썼다. 때마침 불어온 판타지 붐을 타고 책까지 출판되었지만 운이 좋았을 뿐 요즘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며 겸손해했다. 얘기를 조금 더 나눠보니 속된말로 '가관이다'.
그의 전공은 놀랍게도 글과 전혀 관련 없는 컴퓨터 공학 석사(대학원) 출신. 게다가 대학원 졸업 후 대한민국 최고의 전자회사에 합격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S전자에 들어간 이유에는 "연봉이 높아서요"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답변을 내놓는가 하면, "3년쯤 다녀보니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달았다"며 "11년 전 어느 날 술김에 지원한 게임 회사에 합격해 게임 개발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그 술 김에 지원해 합격한 회사도 현(現) 대한민국 최고의 게임 개발사였다.
기자도 짧지 않은 사회생활을 거쳐왔으니 무심한 듯 웃으며 말한 이 답변 속에 얼마나 많은 고뇌, 고민, 노력이 들어갔을지는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었다.
▲ 그는 인터뷰 5분만에 남들은 하나도 넘기 어려운 3개의 관문을 거쳤다고 담담히 말했다. 약간 얄미웠다...
◆ 그는 본래 작고 색다른 게임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이상균 디렉터는 "나는 본래 작고 색다른 게임 개발에 관심이 많았지만, 기업과 시장은 돈 되는 주류 장르에 집중될 수밖에 없기에 오랜 기간 원하는 게임을 개발할 기회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2012년 블루홀에 입사할 때도 원하는 게임이 아닌 새로운 MMORPG(다중접속역할분담게임)를 만들려고 입사한 것.
이 디렉터는 꿈과 다소 거리감 느껴지는 게임을 개발하다가 2014년 말 블루홀이 모바일, 콘솔, VR 등 여러 플랫폼으로 사업을 확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때 다 싶어 제일 먼저 지원했다고 한다.
그렇게 앞뒤 안 보고 뛰어들어 개발한 게임이 바로 '엑스에이전시'. 이 디렉터의 말을 그대로 쓰면 "정신을 차려보니 희한한 게임을 만들었고, 지금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 티저 영상마저 뭔가 '마이너' 느낌이다
◆ 엑스에이전시라는 게임이 희한해? 왜?
이제 게임에 대해 조금 얘기해보자. 엑스에이전시라는 게임이 왜 희한하다는 것일까?
사실 이 게임은 글로 설명하기가 쉬우면서도 어려운 게임이다. 한 줄로 풀어쓰자면 가위바위보를 아는 사람이면 시스템을 파악하는데 5분이 채 안 걸리는 게임인데 정작 게임을 해보면 이기기가 쉽지 않은 게임이기 때문이다.
근미래, 세상에는 '섀도우'라는 이종족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고, 이를 찾아 처치하는 '헌터'라는 직업이 있다. 게이머는 헌터 사무실의 소장이 돼 헌터를 파견해 섀도우를 처치하는 것이 주 스토리. 게임을 시작하면 맵에 8~15명의 헌터가 있는데, 여기에는 헌터와 똑같은 외형의 섀도우가 숨어있다. 이를 찾아 처치하는 플레이어가 승리하는 게임.
쉽게 말하면 누가 술래인지 모르는 배틀로얄식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디렉터는 이를 '신개념 숨바꼭질' 장르라 칭했다.
헌터 간 결투는 '강 공격, 빠른 공격, 방어' 3가지. 이는 서로 상성이 있어 우위 상성을 내는 쪽이 대미지를 주거나 공격을 완전히 막을 수 있다. 만약 똑같은 카드를 낸다면 선공이 이기는 구조. 매 턴마다 공방을 겨루다가 한쪽이 쓰러지거나 8턴이 지나면 전투가 종료된다.
헌터는 다른 헌터를 쓰려뜨려 얻는 헌터 조각으로 새로운 헌터와 계약하거나 스토리를 알 수 있다. 꼭 섀도우를 잡아서 승리해야만 보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한 맵에서 최대한 많은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여기에 섀도우가 걸리면 더 높은 보상을 얻겠지만, 직접 해보면 꽤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위 상성은 가위바위보의 규칙과 같다. 각 상성은 '빠른공격> 강공격, 강공격> 방어, 방어> 빠른공격'이 기본 상성. 여기에 스테미너 시스템이 있어 낼 수 있는 카드를 예측하는 전략성도 더했다.
▲ 심오한듯 간단한듯 심오한 시스템이다. 게임을 해보면 안다.
◆ '하얀 로나프의 강' 캐릭터 파스크란의 등장.
이상균 디렉터는 처음부터 '마이너 장르'로 기획된 게임이다 보니 마케팅 비용이 적거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게임을 알리기 위해 '파스크란'을 등장시키기로 결정했다는 것. 팬 입장에서 '파스크란'의 등장이 반갑긴 한데 그 이면에 처절한 마케팅 이슈가 있다고 생각하니 '역시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안타까움도 있다.
일단 안타까움을 빼면 파스크란의 등장은 원작과 완전히 다른 게임임에도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갑옷과 대검으로 중무장한 캐릭터는 게임 분위기에 맞춰 검은 코트를 차려입은 성검사가 됐다. 스킬도 원작의 느낌을 고스란히 가져와 이상하게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다.
▲ 좌측 상단에 대검을 차고 '바XX맛 우유'를 마시고 있는 캐릭터가 바로 '파스크란'
◆ 론칭 성적은 만족, 무엇보다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있어 대만족
이제 인터뷰의 분위기도 무르익었으니 슬슬 민감한 질문을 던질 차례다.
기자는 이상균 디렉터에게 "론칭 후 2일이 지났는데 디렉터로서 지금 성적에 만족하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사실 기자는 비주류 장르의 게임들이 그렇듯 엑스에이전시도 조용히 론칭해 조용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던진 질문이다.
이 디렉터는 잠시 생각하더니 "엑스에이전시는 글로벌 론칭이고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새로운 국가나 계층을 찾는 것도 목적에 포함돼 있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이어서 "결과적으로 이 시도는 실패했지만, 성적에 대한 부분은 예상 범위 수준이다. 크게 기뻐할 것도, 낙담할 필요도 없는 수준으로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답했다.
여기서 끝났으면 흔한 답변이 됐으리라. 그런데 다음에 꽤 뼈있는 답변이 나왔다.
"알다시피 이 게임은 돈이 잘 벌릴만한 장르가 아니다. 회사(블루홀)에서 당장 눈앞의 돈을 벌기 위한 게 아닌 미래 시장 연구를 위해 허락한 실험적인 게임이다"며 "기왕 실험적이라면 팬 서비스라는 전제도 넣어 제작하고 싶었다. 엑스에이전시를 해보면 알겠지만 일부러 과금 압박이 거의 없게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 또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이상균 디렉터는 "아까도 말했듯 엑스에이전시는 비주류 게임이면서 색다른 게임이다"며 "내가 개발한 게임이 성공하는 것을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게임인 것도 안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래도 게임은 어느 정도 성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좋아하는 '작고 색다른 게임'을 계속 만들려면 일정 이상의 성적이 필요하다는 것. 시쳇말로 쫄딱 망하면, '이제 뻘짓하지 말고 RPG 만드세요'라는 말에 반대할 명분이 없다는 소리다.
결국 엑스에이전시는 억단위 넘는 개발비를 팬 서비스와 실험 정신에 투자하겠다는 블루홀과 실험적인 게임 개발을 좋아하는 디렉터가 만나 탄생한 '괴작'이다. 기자가 자꾸 강조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하지만, 현재까지 게임의 성적도 '딱 예상대로'라고 한다.
기자는 인터뷰를 마치고 이 게임을 좀 노골적으로 추천하고 싶어졌다. 이 디렉터의 만남이 재미있었고, 블루홀의 실험 정신도 응원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뭔가 특이한 게임 없나?'라고 생각하는 게이머가 있다면 오늘 엑스에이전시에 도전하길 권해본다.
혹시 여러분의 취향에 딱 맞을지도?
[배향훈 기자 tesse@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