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전 시리즈는 국내 게이머, 특히 올드 게이머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흑태자와 이올린, 클라우제비츠, 살라딘 등 매력적인 캐릭터, 안타리아와 아르케의 관계, 마장기와 그리마 등 흥미로운 설정, 그리고 강한 인상을 남긴 초필살기까지 게이머들을 열광시킬 요소가 충분했다. '창세기전'에서 '창세기전 3 파트 2'로 이어진 시리즈는 많은 창세기전 팬들을 낳았고, 이들은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창세기전 시리즈를 추억했다. 그렇기에 라인게임즈가 창세기전 시리즈의 부활을 천명한 것은 필연에 가까운 결과다.
라인게임즈가 출시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창세기전 2의 리메이크 버전이다. 창세기전 2가 스토리적으로 미완성이었던 창세기전의 완전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시리즈 첫 작품을 리메이크 한 것이나 다름없다. 즉, 창세기전 시리즈 부활의 신호탄이다. 라인게임즈도 팬들의 기대에 부응해 안타리아 팀을 통해 이후 창세기전 시리즈 전반에 걸쳐 설정을 재정립하고, 이번 작품을 통해 선보였다.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기억을 잃은 레인저 G.S가 망국 팬드래건 왕국의 왕녀 이올린 팬드래건을 만나고, 베라딘의 음모에 맞서 안타리아를 구하는 서사시다. G.S와 이올린의 무도회, 한조 앞에서 정체를 밝히는 흑태자, 폭풍도에서 보여준 이야기의 끝. 자칫 추억 속의 편린으로 사라질 수 있었던 이 모든 장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이 게임의 가치는 충분하다. 흑태자 전하가 돌아오셨는데 무엇이 더 중요할까?
27년 만의 귀환 = 게임조선 촬영
흑태자 전하가 돌아오셨다 = 게임조선 촬영
하지만 우린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미래를 위해 이 게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그래픽과 시스템 양쪽을 말이다.
게임을 하면서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 있다. 이 게임을 꼭 언리얼 엔진으로 만들었어야 했을까? 언리얼 엔진으로 게임을 만들면 더 실감 나는 캐릭터 모델과 화려한 전투 이펙트를 얻을 수 있겠지만, 두 요소 모두 창세기전에 꼭 필요했던 요소라고 보긴 어렵다. 애초에 원작부터 도트 기반의 게임이었고, 최근 고전 게임 리메이크 추세도 원작의 감성을 살린 도트나 복셀이 주류인 점을 생각하면 언리얼 엔진 기반의 실사 그래픽을 택할 근거가 부족하다.
언리얼 엔진으로 만들어도 잘 만들면 상관없다. 문제는 플랫폼으로 닌텐도 스위치를 택한 것이다. 닌텐도 스위치는 2017년 출시된 게이밍 콘솔로 거치와 휴대 양립을 위해 동시기 다른 게이밍 콘솔에 비해 성능이 낮다. 그 결과 처음 체험판이 공개됐을 땐 수준 낮은 그래픽과 프레임으로 질타를 받았고, 정식 출시 시점엔 그래픽과 광원을 개선하는 한편 원활한 플레이를 위한 성능 모드를 추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구간에선 여전히 그래픽이 몰입을 방해한다. 수정했다는 초필살기도 그래픽과 광원 모두 다른 언리얼 엔진 기반 게임들과 비교하면 부족하다. 추후 기기 성능이 더 좋은 플랫폼으로 이식된다면 언리얼 엔진 선택에 대한 평가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창세기전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작품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다.
그래... 뭐 천지파열무가 이정도면 됐지... = 게임조선 촬영
솔직히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이올린 얼굴 때문에 집중이 안됐다 = 게임조선 촬영
모험 모드는 이 게임의 평가를 깎아먹는 주범이다. 개발진은 캐릭터들이 안타리아를 모험하면서 숨겨진 요소를 찾고, 보상을 얻는 재미를 추구했지만, 실제론 복잡한 맵을 느리게 돌아다니는 캐릭터를 보면서 답답한 기분만 들었다. 일부 오브젝트는 상호작용 표시가 없어 그냥 지나치는 경우도 있고, 모험을 도와줘야할 맵 기능은 편의 기능이 부족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볼 인카운터도 마찬가지다. 보상이 좋은 것도 아닌데 무시하다가 선공을 맞으면 모든 파티원의 체력이 강제로 깎인다. 그렇다면 전투가 재밌는가? 비좁은 전투 맵에 광역 기술을 가진 캐릭터가 있다면 쉽게 해결되는 수준이라 전략이나 전술을 느끼기도 힘들다. 캐릭터 육성을 위해 필요한 전투도 아니고, 스토리에 꼭 필요한 전투도 아니니 게이머에겐 전투를 치를 동기가 부족하다.
모험 모드가 없었다면 이 게임의 재미가 줄어들었을까? 모험 모드 없이 스토리와 전술 전투를 번갈아가며 보여줬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스토리 직후 전술 전투로 이어졌다면 게이머가 느끼는 몰입도와 감정선을 더 잘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숨겨진 요소 역시 전투 중 특정 지점에 이동하거나 일정 체력 이하일 때 퇴각하는 적을 완벽하게 처치했을 때 얻는 식으로 충분하다.
맵은 쓸데없이 복잡한데 캐릭터는 굼벵이다 = 게임조선 촬영
오브젝트는 상호작용 표시라도 띄워야 하는거 아닌가? = 게임조선 촬영
전투는 평범한 SRPG다. 사각형 칸으로 구성된 맵을 이동력에 따라 배치하고, 공격 사거리와 범위를 고려해 적을 공격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캐릭터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을 때 달라지는 명중 및 치명타 수치나 초필살기 유무 정도가 변수로 활용되는 식이다. 내가 조작하는 캐릭터와 조작 범위를 알아보기 힘들긴 하지만, UX 디자인 문제를 제외하면 큰 특징 없이 무난한 SRPG식 전투다.
전투 자체는 평범하다 = 게임조선 촬영
원거리 공격, 광역 공격의 유무는 전투의 난이도를 크게 바꾼다 = 게임조선 촬영
냉정하게 말하면,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게이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은 아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그래픽과 시대를 역행하는 시스템은 동시기 출시된 SRPG와 동떨어져 있다. 대세를 따르지 않는 개성 넘치는 작품이라고 말하기엔 완성도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실패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많은 팬이 원하던 완성된 작품으로서 창세기전, 시리즈의 계보를 잇는 정통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작품으로서 창세기전. 서비스 종료된 '창세기전 4'와 '창세기전: 안타리아의 전쟁', '주사위의 잔영'을 겪은 창세기전 팬에겐 이만큼 달콤한 말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팬들에게 있어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창세기전 시리즈의 부활을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을, 그리고 그리워하던 추억을 다시 만나게 해준 작품이기에 사랑하고 아낄 것이다.
[성수안 기자 nakir@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