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오플에서 개발하고 넥슨에서 퍼블리싱하는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 '던전앤파이터'와 그 파생작들은 장르 및 플랫폼의 다변화를 꾀하는 와중에도 '액션쾌감'이라는 주제는 결코 잊지 않는다는 대전제를 깔고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시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게임을 만드는 과정에서 묻어나오는 그 뚝심 있는 개발철학은 많은 이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던전앤파이터 프랜차이즈 게임이라면 액션 하나만큼은 믿고 플레이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때문에 던전앤파이터를 기반으로 하드코어 ARPG 장르에 도전한다는 소식은 소위 말하는 '좀 치는 게이머'들에게 초유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었다. 쉴새 없이 죽어가며 배우는 '유다희'의 세계에 '액션쾌감'을 과연 접목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 궁금증은 95% 이상의 이용자가 긍정 평가를 내리고 평단에서도 수작의 커트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80점을 넘기는 '퍼스트 버서커: 카잔'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던파 버서커의 시초라고 하니까 당연히 분노 조절 안되는 진짜 광기인줄 알았지...
사실 개발진 측에서 카잔의 스토리는 원작을 몰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몰입하고 플레이할 수 있는 서사를 준비했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솔직하게 평가하라고 한다면 특별히 와닿는 것이 없었다.
본래 소울라이크, 인왕라이크로 대표되는 하드코어 ARPG의 경우 스토리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 단순하게 일직선 진행방식을 고수하더라도 엔딩을 볼 수는 있겠지만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선 반드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파편화된 정보들을 모아야 한다.
그 과정은 당연하게도(?) 불친절하게 다가온다. 수많은 NPC와의 대화에서 단서를 찾거나 여기저기 주워모은 수집품을 통해 끼워맞추기를 하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만큼 진짜 엔딩에 도달했을 때의 감동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만나본 '조국에 배반당한 대장군 카잔'은 버서커(광전사)라는 별칭과는 달리 복수 하나만을 위해 광기에 빠져드는 모습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카잔은 굉장히 이성적으로 복수할 대상을 확인하고 두 눈으로 진실을 찾겠다는 신중한 인물상을 가진데다가 반강제로 조력자가 된 블레이드 팬텀이 빨리 해야할 일을 하라고 독촉할 정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위기에 처한 무고한 이들을 최대한 돕고 다닌다. 이게 어딜 봐서 '복수에 미친 광전사'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심지어 엔딩 시점에 다다르면 다소 맥이 빠지는 뻔한 전개가 플레이어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반대로 원작을 플레이해본 '던붕이'들은 지나가다 마주치는 인물의 이름과 뒷모습 그리고 '혼돈'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 대략적인 전개와 결말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여서 어느 쪽도 만족시켜주기 힘들다는 결론이 나온다.

카잔의 서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고생한 만큼의 카타르시스'가 전달되지 않고
반대로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겨우 이런 내용이었나'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다
반대로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겨우 이런 내용이었나'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느껴지는 '액션쾌감'은 앞에서 언급한 아쉬움이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몇번이고 플레이테스트를 진행하고 피드백을 받아 밸런스 조절을 진행한 결과겠지만 정식 출시 버전을 기준으로 카잔의 액션은 어느 구간이든 모난 곳 없이 맛있게 매운 형태로 완성되어 있었다.
초반이야 으레 들어오는 공격에 전혀 대처가 되지 않아 수초 이내에 눕는 과정이 반복될 뿐이고 그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생각 이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구성에 감탄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가령 플레이타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될 보스전의 경우 기본적으로 선공을 가하는 것 보다는 상대의 패턴을 보고 피하면서 체력과 기력을 서서히 갉아먹은 뒤 탈진 상태에 빠뜨려 시원하게 풀차지 강공격이나 빠른공격 콤보 한세트 넣어주고 브루탈 어택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과정에서 박치기 공룡처럼 단순하게 머리를 들이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심히 관찰을 해본다면 카잔과 보스의 물리적인 거리와 위치, 서로가 직전에 취한 행동에 따라 어느 정도 명확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소위 말하는 억까가 거의 없고 패배하여 게임오버 화면을 보더라도 '내가 실수했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합리적인 공방이 이뤄진다.

짤딜을 넣겠다고 투창 한번 넣는 것을 포기했다면
완벽 회피를 했을만한 상황
예를 들어 엠바스 유적지의 보스로 등장하는 바이퍼의 경우 제자리에서 창을 돌리고 3번 공격하던 패턴이 갑자기 5번 공격한다면 카잔이 공격을 피하거나 공격을 가드하여 뒤로 밀려나더라도 여전히 바이퍼의 공격 범위 내에 들어가 있으면 추가 공격을 가한다는 사실에 도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딘 폐광 보스인 말루카의 2페이즈 주요 패턴 중 하나인 3연속 돌진 발도의 경우 준비 자세에서 돌진 방향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카잔의 위치를 추적하는 방식이라서 피하거나 막으면 반드시 카잔을 넘어가서 등짝을 본 다음 카잔을 향해 2차 베기를 시전하게 된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원래 폭풍은 두번 몰아친다'고 의식하면 어느정도 피하는 요령이 생긴다.
심지어 스테이지 진행 구간에 등장하는 일반/엘리트 몬스터도 유심히 살펴보면 해당 스테이지의 보스전과 연동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이퍼가 사실상 뉴비 분쇄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엠바스 유적지를 진행하면서 쌍날 도살자와 싸우는 게 익숙해진다면 적어도 대점프 분쇄, 2연속 찌르기 후 베기, 엇박으로 2연속 베기라는 공통 패턴 3개는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게 될 정도다.


원작에서도 골격이 비슷한 몹은 패턴을 공유하는 경우가 많으니
어떻게 보면 훌륭한 원작재현일지도?
어떻게 보면 훌륭한 원작재현일지도?
기력을 갉아먹어 탈진으로 만드는 방법론에 대해서도 꽤 깊이가 있다. 게임 내에서는 크게 인간형 적과 비인간형 적을 구분하여 기력 게이지의 색깔을 흰색과 보라색으로 나누고 있으며 인간형 적은 카잔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기력을 회복할 수 있지만 반대로 모든 행위에 있어서 기력이 코스트로 들어간다.
때문에 인간형 적의 경우 행동 양식을 잘 파악하면 패턴 도중이더라도 상대를 탈진으로 만들어 일방적인 딜찬스로 전환할 수 있는 변칙적인 템포의 전투가 주가 된다.
반대로 비인간형 적은 기력을 자연회복하지는 못하지만 아무리 많은 행동을 하더라도 기력이 따로 깎이지 않기 때문에 가급적 모든 공격을 저스트 판정으로 막고 피하면서 갉아먹어 탈진시킨다는 다소 정직한 느낌의 전투 양상을 보인다.
물론 사용하는 무기와 플레이어의 성향에 따라 빌드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어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일반론으로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계속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왜 게임을 출시하기 전부터 그토록 보고 '대응할 수 있는 명쾌한 전투공식'을 그토록 강조했는지 절로 납득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 완성도는 대단한 수준이라 볼 수 있다.

타점과 위력, 누적 피해량이 잘 맞아떨어지면
보스를 샌드백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이 게임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게임의 진행상황에 따라 액션의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점이다.
게임을 시작하는 시점의 카잔은 본래 역사처럼 양팔의 힘줄이 끊어진 채로 무력하게 죽기 일보 직전이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이면 빌빌거리고 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적어 나약하기 그지 없는 존재다.
때문에 원작 던전앤파이터의 버서커가 예전에는 포텐셜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방어력을 포기하고 낮은 체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어 버복치(버서커+개복치)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초반의 카잔은 들어오는 모든 공격에 완벽하게 대응해야 하고 호기심을 보이거나 근거없이 배를 째는 플레이를 했다가는 그대로 사망하는 무력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게임을 진행함에 따라 상황은 급격하게 달라지게 된다. 라크리마를 모아 능력치를 펌핑하고, 장비와 세트 옵션을 통해 부족한 특수 효과를 채워나가며 스킬을 하나 둘 배우기 시작하면 카잔은 서서히 본연의 강함을 되찾을 수 있게 되는데 이게 게임 초반에 한대한대가 치명적으로 느껴지던 똑같은 '카복치'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다이나믹한 전투를 보여줄 수 있다.
특히 액티브 스킬이나 투창을 시전할 때 소모되는 별도의 자원 '투지'는 관련 지속 효과를에 포인트를 집중 투자하면 수급처가 늘어나서 중간중간 투창을 던져 비워주지 않으면 손해를 보게 될 정도로 여유가 넘치게 된다.
플레이어의 실력이 향상되는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선택지도 늘어나기에 카잔의 액션은 초반이 미약할지라도 그 끝이 창대해지는 대기만성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초반엔 한대씩 조심스레 주고 받으며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지만

투지를 1칸 사용하여 선딜레이동안 들어오는 공격을 무효화하는 돌진기 '섬광격'
후반에는 이런 식으로 남발하는게 가능할 정도로 전투의 느낌이 달라진다
후반에는 이런 식으로 남발하는게 가능할 정도로 전투의 느낌이 달라진다
1차적으로 게임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본 시점에서 카잔은 기존에 있었던 하드코어 ARPG와 비교한다면 특정 게임이나 시리즈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고 딱 잘라서 규정 짓기 어려운 '독특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다
소울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고 인왕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해도 그 또한 틀린 말이 아닌데 그러면서도 카잔은 단순하게 이미 있던 레퍼런스들을 뒤섞어놓은 것에 그치지 않았고, 플레이어가 패배하더라도 화가 나기보다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높은 퀄리티의 보스전을 꽤나 푸짐하게 차려놓으며 소위 말하는 카잔스러움을 완성해냈다.
초반에서 언급했듯이 기대에 못미치는 스토리텔링이 아쉽긴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게임의 평가에 악영향을 끼칠만한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단점이 있음에도 이용자와 전문가 평가가 모두 높은 것을 보면 개발진의 액션철학이 얼마나 치밀하고 완성도 높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 '둠 시리즈'의 개발자 '존 카멕'은 "스토리보다 게임 플레이가 중요하다(the most important games have been all about the play, not the story)"라는 말을 남긴 바 있는데, 카잔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 멘트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소감을 남기고 싶다.
"카잔의 정체성은 액션에 두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10점 만점에 10점을 줄만한 액션 게임이 있다."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