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무더운 날이었습니다.
강박처럼 매일 같은 시간, 집을 나오는데,
빳빳한 셔츠 깃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한결 시원해졌음이 느껴집니다. 아마 이대로 새벽 공기가 더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어스름한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겠지요.
더위는 가고, 짧은 가을이 오고, 다시 또 긴 겨울을 맞이해야 할 겁니다.
이 '업(業)'은 늘 그랬습니다.
많은 부침을 겪어왔고, 항상 어려운 숙제가 주어졌었죠.
매정할 정도의 무관심이거나, 뻔한 셈 노름이 들켜 호된 평가와 조롱, 비아냥이 쏟아져도 지나고 나서 보면, "또, 언제 이런 걸 준비했나-" 싶을 정도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올해는 유독 놀랄 일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회사명과 게임명을 콕 짚어 말하진 않겠습니다만)
요 몇 년 사이 유수의 프로젝트들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습니다.
물론 그 기저에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아픈 손가락이 남았겠지만 우리는 알고 있죠. 그 손가락들조차 남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였고, 끈질기게 도전했기에 오롯한 결과를 봤단 사실을요.
우리가 좋아하는 이 업의 핵심은 가없는 상상력이기에.
끈질긴 도전은 변화를 만들어냄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드문 것, 새로운 것을 시도한 회사들은 응원과 기대감 속에 변화를 주도하고 있고, 흔한 것, 하던 것만 해온 회사들은 마켓 순위 놀음에 고립된 채 풍화되어갑니다.
혼내려는 게 아니고요.
큰 물결은 막을 수가 없고, 변화는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변화가 이미 발목을 적시었는데 그곳에 머물러 있기만 해선 안되겠죠.
우리들에게도 '글눈'과 '말귀'는 미디어의 변화 속 던져진 난제입니다.
활자는 낯설고 영상은 익숙한 요즘 세대들은 글눈은 어둡고, 말귀는 더 빨리 트인다나요? 더욱이 필설은 연예적 재능이라 아무리 흉내내어 봐도 더 재미있고 좋은 콘텐츠가 범람합니다.
기자는 진실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라,
기자의 바른 눈은 쌀 한 톨에서도 우주를 보고, 독자의 마음을 물들인다고 하는데,
우리의 눈은 업의 변화를 가장 먼저 접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글은 얼마나 변화해 왔을까요?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젊을 때, 그 언제인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난 도대체 언제까지 게임을 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게임이 생기고, 시스템도 복잡하고 컨트롤은 당연히 어렵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게임의 장르조차도 처음 봐 당황한 적도 있었습니다. 짧은 마켓 리뷰가 이 업의 전문가랍시고 월급을 받는 저보다 더 그 게임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남보다 수백, 수천은 많은 게임을 접하고, 평론을 하면서도 조금씩 뒤처지고 마는 겁니다.
이렇듯 변화에 하릴 없이 끌려가다 보면 인정해야 할 날이 옵니다.
전문 기자가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전문가가 아니고,
개발자 모두가 AAA급 게임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콘텐츠를 만드는 모두가 100만 유튜버가 될 수는 없다는 걸요.
어느 순간 변화에 뒤쳐진 우리의 글은,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고, 세련되고, 센스 있는 미디어들에 이제 미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더운 볕이 차츰차츰 지나가고,
녹음이 가득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또 어느 날인가 아침 추위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거란 걸 알고 있듯이.
늦었지만, 느리지만, 또 어떤 손가락이 아플 수도 있겠지만, 우리도 변화를 준비해나가려 합니다.
더 이상 남보다 게임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더는 요즘 세대에 술술 읽히는 맛깔나는 글을 쓰지 못하더라도,
신선한 아이디어와 그걸 풀어 가는 재미있는 언변은 없더라도,
1분 안에 사람들을 사로잡는 화려한 재능이 없더라도,
그래도 우리만의 시선으로 남긴 이 글감 하나는 누군가 읽을 만한 '게임 이야기'이겠죠. 그래서 우린 오늘도 게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생각을 전할 수 있다는 게 그 자체로도 얼마나 행복한 업인지요.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스물다섯의 해를 지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오락실, 누군가는 게임기, 누군가는 PC방에서 느꼈던 그 어린 날의 추억에 푹 빠져, 게임에 대한 애정을 일점일획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 즐거운 일을,
천변만화의 바람에 몸 실어 또 겨울을, 또 여름을 나도록 나아가겠습니다.
게임조선 임직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