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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인물열전] 눈썹 휘날리며 30년동안 도게자만 깎은 노인 '닥터 와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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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주연과 조연, 다양한 등장인물이 있듯이 게임에서도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해 게이머의 몰입감을 높여줍니다. 특히, 대작이라 평가받는 게임은 영화 이상의 스토리와 캐릭터성으로 많은 게이머들에게 여전히 회자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작품 밖에는 기획자, 프로그래머, 일러스트레이터 등 게임이라는 세상을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개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피땀 흘려 만든 게임은 게이머에게 때론 웃음을, 때론 눈물을 선사하며 일상의 피로를 잠시 잊게 만들어 줍니다.
 
때론 주인공, 때론 친구, 때론 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부터 게임이라는 세상을 탄생시킨 개발자들까지 게임에 관련된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했습니다.
 
[편집자 주]

<칠종칠금>이라는 고사성어에 대해 알고 있으신가요? 중국의 후한말 시대 흔히들 말하는 '삼국지'와 관련된 이야기로 촉한의 재상이었던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적국의 수장이었던 '맹획'을 일곱 번 잡고(七擒) 일곱 번 놓아주며(七縱) 진정으로 복속을 이끌어냈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게임 내에서는 이처럼 대립자 또는 대립 세력과 단판 승부로 끝이 나는 경우가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싸움이 일어나는 상황은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 게임이 시리즈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인기 IP라면 더욱 그렇죠.

​하지만 게임은 클리어하라고 있는 것이고 최종 보스는 무찌르라고 있는 것이기에 게임 속에서는 칠종칠금의 고사처럼 곱게 놓아주고 다시 승부를 겨루기보다는 일단 해치우고 보자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스토리상 최종보스를 처치하거나 최소한 봉인해 버리는 강경책을 사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최종보스도 부활, 재구축, 전생, 봉인 해제 등 초자연적인 수단을 포함한 온갖 방법을 통해 복귀를 도모하고 그렇게 재등장하는 최종보스들은 대부분 사망전대로 취급되죠.

​그런데, 여기 천재적인 두뇌, 눈썹만 씰룩거리는 안면기예, 그리고 환상적인 도게자(사죄의 큰절) 실력만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채 몇 번이고 최종보스 역할을 수행하는 진귀한 인물이 있습니다. 록맨 클래식 시리즈의 메인 빌런이자 그 이름도 유명한 '알버트 와일리 박사' 통칭 닥터 와일리가 되겠습니다.


사실 동시기에 출시된 다른 게임에 으레 등장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처럼 초기작에서 와일리 박사의 행동 기조는 무척 단순했습니다. 단순히 자신보다 돋보이는 '라이트 박사'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비뚤어진 인정욕구를 세계 정복으로 채우려고 하는 소위 말하는 찐따미가 그윽한 캐릭터였죠.

​당연히 절대악보다는 소인배에 가까운 악역이기에 제작진은 시리즈 내내 '와일리 박사'가 연거푸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는 독특한 캐릭터를 부여하되 그 최후는 항상 처참하고 끔찍한 최후가 되지 않도록 안배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 웃으면서 '쟤 또 저러고 다음 편에 나오겠지'라고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래서 매 시리즈마다 준비해 놓은 로봇이 모두 고철이 되고 와일리 머신을 활용한 무의미한 저항 끝에는 항상 도게자를 하며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 필수 요소로 들어가게 됐고, 와일리 박사는 록맨에게 잡혀가더라도 탈옥, 협력을 가장한 배신, 입체 영상을 이용한 눈속임, 이마에 점 찍고 다른 사람인 척하기(...)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차기작에서는 메인 빌런으로 복귀하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로 자리잡히게 됩니다.

오히려 와일리 박사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지 않는 록맨과 라이트 박사를 두고 팬덤에서는 블랙말랑카우 그 자체라는 평가를 내릴 지경입니다.

 

물론,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추가 설정을 통해 와일리 박사는 진심으로 자신의 창조물인 '로봇'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품고 있으며 그들이 인간에게 끝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우려하였기 때문에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다는 진짜 속내가 밝혀졌고, 록맨이 그를 직접적으로 처단하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로봇 3원칙 중 1원칙인 직간접적으로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시리즈의 장기화로 인해 반쯤 개그 듀오로 고착된 이미지는 바뀌기 힘든 단계에 이르렀죠.

그래서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것인지 후기작에 이르러 캡콤은 아예 꺾기도처럼 변주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록맨 10의 엔딩에서는 사죄의 큰 절 도중 감기에 걸린 와일리를 보고는 걱정하며 병원에 데려다주는 록맨과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냥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혼란을 야기한 '로봇 감기'의 치료제를 병실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채 홀연히 떠난 모습으로 보기 드물게 훈훈한(?) 결말을 연출하기도 하며, 가장 최신작인 록맨 11에서는 라이트 박사가 직접 현장에 나서 와일리 박사를 연행하는 대신 화해의 손길을 건네지만 와일리 박사는 흥칫뿡을 외치면서 제 갈 길을 가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시퀄에 해당하는 '록맨 X 시리즈'에서는 와일리 박사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로봇을 중시하는 사상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극악무도한 악인이 되었다는 묘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남긴 마지막 아들 '제로'는 끝내 많은 사람과 로봇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모두의 영웅으로 인정받는 결말을 맞이했으니 그의 기나긴 투쟁이 결코 무의미하고 헛된 과정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시리즈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만큼 후속작이 정말 드물게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록맨 시리즈의 팬들은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이 박사님이 늘 그렇듯 눈썹을 휘날리며 돌아올 것이고 그 끝은 굽신굽신 거리는 도게자일 것을 말이죠.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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