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
첫돌 지난 처의 조카는 엄마, 아빠 다음으로 ‘아파’를 배웠다고 합니다. 자기 의욕을 못 이긴 걸음걸이에 뒤뚱거리다 엉덩방아 찢고 뒤돌아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아파, 아파’ 이러는 것이 너무 귀엽습니다. 넘어지거나 부딪쳐 아프면 울면서 엄마를 찾기보다 아파를 먼저 말하고 보는 겁니다.
이렇듯 ‘요즘 아가’들은 ‘아파’를 빨리 배운다고 하네요.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고 그걸 말로 표현하여 알리는 행위 자체가 정서적 안정감에 큰 도움을 준다나요.
“아파요. 아픕니다.”
오랫동안 그 말을 잊고 살았습니다. 비단 건강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안 좋은 일, 위험, 그리고 불안 요소, 잘못은 감추기에 급급했고, 수치적으로 아주 조금 말할 만하면 부풀려서 얘기하길 좋아했죠. 어떨 때는 거짓을 말할 때도 있었을 겁니다. 숨긴 겁니다.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가는데 ‘지금의 우리’가 책임질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좋았던 적은 별로 없었어요.
폭탄 돌리기식으로 미루어온 그 외면이 가져온 파장은 컸습니다. 모바일로, 소셜 네트워크로, 1인 미디어, 영상 콘텐츠로 변해가는 시대에 참 많이 헤매고 있습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게임에 관한 글을 쓰는 기자로서의 고민이 많을 수밖에요.
그래도 게임은,
그리고 게임을 글로 표현하는 이 일은,
여전히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정사통(痛定思痛)이라 했던가요? 이제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게임이란 업(業)도 참 많이 아팠습니다.
이 업은 수치적으로 많은 성장과 발전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문화 콘텐츠 산업을 이뤄냈습니다. 이 양적 성장 속에서 진심 어린 박수와 환영을 받고 있을까요? 아쉽게도 아직 그 기저에는 흥행 사업의 일환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지 기반이 약한 이 업은 말 몇 마디, 일부의 목소리만으로 쉽게 손가락질 받았고, 쉽게 휘둘려 왔습니다.
혹자는 특정 집단의 입김이 작용해서, 일부 정치적 이유로, 오락실에서 등짝 맞던 시절 부모 세대의 팽배한 인식 탓 등 여러 이유를 문제 삼지만 사실 이 업을 향한 가장 아픈 손가락은 어느 고명한 학자도, 정치인도, 부모님도 아닙니다.
그들은 어릴 적의 우리, 게임을 업으로 삼기 전의 우리와 똑 닮았습니다. 게임을 즐기고 재미있어하고, 아낌없이 말로써, 글로써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길 주저하지 않는 이들. 바로 우리에게 뼈아픈 평가를 내리고, 호된 채찍질을 가하기도 하는.
바로 ‘유저’라 불리는 게이머들입니다. (어느 세상 속에선 사령관, 마스터, 용사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그들은 이 업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 줍니다. 질병이니 중독이니 하는 잘못된 프레임에 기꺼이 한 목소리를 내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얼마나 든든한 우군인가요.
아픔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종교인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불교 용어로 초심(初心)과 관조(觀照)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깨달음을 구하려고 한 마음과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전적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게임을 좋아하게 됐고 또 무엇을 바라고 이를 업으로 삼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즐겼던 게임은 어떤 게임이었나요?
이 업을 알리는 데 있어 얼마를 버는 ‘콘텐츠’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콘텐츠’인지가 중요한 것이죠. 그리고 그 결과로써 우리의 업과 유저가 비로소 서로 응원하고 기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때는 어떤 부침이 있더라도 맞잡은 손 하나로 견뎌낼 수 있을 테니까요.
다행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런 치열한 곳에서 스무 해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초심(初心)에서 관조(觀照)하고, 제 역할의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해 한 해 더 욕심낼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게임조선 임직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