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을 휩쓴 게임계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류가 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하위문화 '서브컬처(Subculture)'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전적인 의미만 따져도 대중성에서 거리가 멀어 보이고 일반적으로는 오타쿠, 힙스터들이나 좋아할 법한 해당 콘텐츠가 게임계를 휩쓸었다는 말은 언뜻 보기에 어폐가 있어보인다.
하지만, 서브컬처 계통의 게임들은 소수에 해당하는 이들의 니즈를 100%, 아니 120% 만족시키는 콘텐츠를 선보이며 충성도 높은 팬덤을 유치하고, 그렇게 형성된 팬덤은 누군가 등을 떠밀지 않았음에도 게임 내에서 발견된 작은 단서에서 복선과 큰 그림을 찾는 칼럼 작성, 주어진 설정만으로도 뇌 내에서 그려진 온갖 상황을 글과 그림으로 구현해 내는 2차 창작, 나 자신이 게임 캐릭터가 되는 코스튬 플레이에 이르기까지 반영구적으로 지속 가능한 콘텐츠 생산 라인을 구축하고 있다.
이런 선순환으로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는 부분에 있어서 게임을 제작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치는 높은 수준의 서브컬처 분야 이해도라 할 수 있는데. 국내 게임사 중에서는 '넥슨게임즈'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여주고 있어 그 기대감이 높은 상황이다.
넥슨게임즈를 대표하는 작품들
엄연히 따지면 넥슨게임즈는 처음부터 서브컬처 게임 하나만을 바라보는 회사는 아니었다. 대표작인 서든어택, V4, 블루 아카이브, HIT 2, 퍼스트 디센던트는 전부 장르가 다르며 프로젝트 DX와 같이 개발 중인 신작을 제외하면 라이브 서비스되는 게임 중 서브컬처로 분류되는 작품은 기껏해야 블루 아카이브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단 하나의 작품에서 보여준 역량은 많은 게이머들의 기대치를 한참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이미 다른 여러 작품에서 참신한 기획력과 개성 넘치는 세계관을 구축한 바 있는 프로듀서 '김용하'가 키를 잡으며 출항한 프로젝트 MX호, 지금의 우리가 '블루 아카이브'라고 부르는 작품은 처음부터 서브컬쳐의 본고장인 일본 시장이라는 명확한 조준점을 겨냥하고 있었고 '현대적인 학원도시'와 '초자연적인 신화/전설'을 배합하는 청량감 넘치는 어반 판타지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3년 넘게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유지하고 있다.
정말 건전하고 건강하고 밝은...
블루 아카이브가 서브컬처 게임계에서 가지는 가장 큰 의의는 명확하게 소비자층을 설정하고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어 가려운 부분을 정확하게 긁어냈다는 것이다.
창작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창성을 확보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만큼 많은 서브컬처 게임들이 소위 말하는 중2병에 찌든 것처럼 있어 보이고 그럴듯한 설정과 고유명사를 남발하며 스토리와 콘텐츠를 전개하고 있는데, 폐쇄성은 짙어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이용자들은 스토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물론 감정선조차 따라가기 버거워하는 것이 서브 컬처 게임들의 현주소다.
그런데 이 게임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은 3명이 모이면 전차 1대를 능히 상대하고 총에 맞아도 끄떡없는 무적의 여고생 기믹을 가지고 있다 보니, 이를 적극 활용하여 위기에 빠진 학원을 구하기 위해 은행을 털자는 학생회, 푸딩의 상태가 불량하다는 것과 같은 시덥잖은 이유로 일주일에 한 번꼴로 실각되는 지도부, 청소부 메이드로 위장하고서는 다 때려 부수고 피해를 키우는데 능한 비밀 요원과 같이 낙차를 잴 수 없는 급커브를 시도 때도 없이 구사하고 있다.
블루 아카이브의 어처구니없는 부조리 코미디는 8부 능선을 넘어 대유쾌 마운틴에 도달하고 있는데 이렇듯 적당히 가볍고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 나사빠진 초전개는 분명 다른 서브컬처 게임에서 맛볼 수 없는 경지였고 그 변태적인 디테일에 감탄하는 이들은 자연스레 차기작을 기대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올해 공개된 대책위원회 3장 신규 캐릭터는 미실장 상태임에도 도킹가키와 같은 밈과 팬아트가 쏟아져나왔다
그래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넥슨게임즈는 서브컬처 전문 부서인 'IO본부'를 신설하고 지난 10월 NEXT ON 미디어데이에서 차기작인 '프로젝트 RX'를 정식으로 선보였으며 DW 스튜디오에서도 서브컬처 요소를 접목시킨 수집형 ARPG '프로젝트 DW'를 정식으로 공개했다.
모기업인 넥슨에서 내세운 '세계에서 사랑받고, 사회에 기여하고 사랑받는 게임'이라는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도전적이고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서브컬처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프로젝트 RX는 MX스튜디오에서 이미 검증된 인력들을 통해 개발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력적인 캐릭터와 함께하는 생활 콘텐츠와 교감을 즐기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전작인 블루 아카이브에서 유쾌하고 밝고 건강하며 과정이야 어떻든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스토리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캐릭터는 분명 강점으로 취급받았지만, 그와 별개로 게임의 진행 방식은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이 매우 제한적이고 경직되어 있다 보니 이런 부분을 강화하는 것이 프로젝트 RX가 추구하는 전략의 핵심으로 보인다.
당번 세우고 대사 몇줄이 끝이었던 메모리얼 로비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기를
한편, 프로젝트 DW는 던전앤파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아라드 세계관에 서브컬처 요소를 접목시켜 수집형 ARPG를 만드는, 넥슨게임즈가 선보이는 새로운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던전앤파이터: 아라드'로 명명된 해당 게임은 레벨 디자이너 채용공고에서부터 오픈월드 ARPG에 한 획을 그은 게임들을 직접적으로 명시하며 그 플레이 경험과 이해도를 우대사항으로 기재하고 있다.
이는 수박의 겉을 핥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해당 장르의 게임을 해체 분석하고 재해석하여 수준 높은 서브컬처 게임을 완성하겠다는 제작진의 의중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미 원작부터 69개에 달하는 플레이어블 직업(캐릭터 풀)을 보유하고 있으며 각 직업에 전직 및 각성 스토리와 같은 배경설정을 통해 부여한 독특한 개성이 선례로 남아있는 만큼, 이를 다듬기만 해도 충분한 볼륨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반드시 본편과 동일한 시열대와 사건을 다루도록 강제되지 않는 'DNF 유니버스'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기존 던전앤파이터 이용자는 물론 새로 게임을 접하는 이용자들에게도 충분히 신선하고 즐거운 서브컬처 기행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도 가능한 부분이다.
벨트스크롤과 핵앤슬래시가 아닌 다른 방식의 액션쾌감을 추구하는 모습
예나 지금이나 종류를 불문하고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에게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비난이라고 한다면 '내가 해도 저거보단 잘하겠다'를 들 수 있다. 실제로 '내가 게임 개발을 해도 저거보단 잘 만들겠다'와 '내가 캐릭터와 설정을 짜도 저거보단 잘 만들겠다'는 서브컬처 게임 커뮤니티에서 게임을 비판할 때 심심찮게 들려오는 멘트다.
분명, 서브컬처 콘텐츠에 몰이해가 동반된 이들이 만든 게임은 이용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고, 그 반대로 개발되는 과정과 그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열의 하나로만 제작한 작품은 게임으로서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였을까? 넥슨게임즈의 최근 행보는 '답답하면 너희들이 가서 뛰든디(답니뛰)'나 '게임 알지도 못하는놈들아 너네들이 와서 함 해볼래(겜알못)'와 같은 반발심리를 역으로 이용하여, 게임 개발이 가능한 인재 중에서 서브컬처를 사랑하고 직접 즐기는 이들을 규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완성도 높은 게임과 지속가능한 서브컬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잡겠다는 욕심 가득한 심산이다.
하지만 충분히 고도화된 개발력과 라이브 서비스 경험을 통해 축적한 노하우가 있는 그들에게 서브컬처 콘텐츠를 사랑하는 진짜들의 덕력이 첨가된다면 이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 분명 이룰 수 있는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품는 게이머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
필자 또한 서브컬처 게임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넥슨게임즈에서 개발하고 있는 작품들이 연타석으로 홈런을 때리며 그 기대에 부응하는 퀄리티로 만나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채용공고만 봐도 신뢰가 가는 모습이다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